기업의 인권경영은 보고서 속에만 존재하나
[휴먼 라이츠 브리핑] 기업의 지속가능성과 인권경영 실천.점검의무
기업의 인권경영은 보고서 속에만 존재하나

'기업과 인권 (Business and Human Rights)'은 아직도 일반시민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한국 기업들에게 생소한 개념일 수 있다. 'Business and Human Rights'는 국내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업과 인권'으로 번역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국가인권위원회나 법무부 등의 정부기관에서 기업의 인권친화적 경영을 '인권경영'으로 지칭하면서 두 용어가 유사한 의미로 인식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이 비즈니스 활동에 따른 다양한 이해관계자에 대한 기업의 인권적 책임을 함축적으로 내포하는 'Business and Human Rights' 본래의 뉘앙스를 얼마나 일반 대중에게 직관적으로 전달해 주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는 기업과 인권에 관련된 주요 용어들의 개념 정립도 아직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이는 단계이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기업의 인권 책임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하나의 보편적 원칙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 최근 추세이다. 급속한 글로벌화와 기존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기술적 패러다임의 혁신 속에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류공동체를 위한 기업의 역할과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 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2011년 유엔의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 (UNGPs)' 발표 이후 2019년 11월 현재 22개국이 '기업과 인권 국가이행정책 기본계획(NAP)'을 수립하였고, 실질적 이행중심의 산업별 실천·점검의무(Due Diligence)체계 구축과 경영활동 전반에 걸친 인권가치 접목에 국제사회의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 특히 2018년 유엔 기업과 인권포럼에서는 기존 논의의 주요 이슈였던 책임 있는 공급망의 관리, 산업안전, 소비자권리, 환경보호, 노동권 등에 대한 실천·점검의무 이행을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기업의 인권 이슈와 과제들로 논의의 범주가 확대되었다. 


일례로 필자가 참여했던 인공지능(AI)의 기업 인권영향에 관한 세션에는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인텔 등 세계 IT산업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참석하여 신기술 시대 기업들이 사업활동과정에서 수시로 직면하고 있는 인간가치에 대한 새로운 도전 및 불확실성과 이에 대응하기 위한 인권적 원칙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 자동차의 운용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자체는 기술적인 과정이지만 예상되는 다양한 사고상황에서 누구의 생명을 우선적으로 보호하도록 프로그래밍 할 지는 단순히 한 기업이 기술적 관점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는 보편적 인권의 원칙에 기반한 신중한 검토와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하겠다.

이런 국제사회의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우리나라에서도 '2018~2022년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 기업의 인권존중 책임을 명시한 기업과 인권에 관한 별도의 장이 마련되었다. 이와 함께 2018년 8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지방공기업법', '지방자치단체 출자·출연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경영평가를 받는 980여개 공공기관과 공기업들을 대상으로 인권존중 책임의 제도화를 위한 '공공기관 인권경영 매뉴얼'의 실행을 권고하였고, 이후 공공기관과 공기업들을 중심으로 인권경영 체계도입이 빠르게 확산되어 나가고 있다. 또한 2019년 8월~11월 법무부는 기업의 인권경영 증진을 위한 '기업 인권경영 지침(안)' 공청회를 실시하였다.

국가인권위원회'공공기관 인권경영 매뉴얼'의 경우 인권경영 실천·점검의무 이행을 위한 인권경영 거버넌스 구축과 정책이행 프로세스를 '인권경영 체제 구축, 인권영향평가 실시, 인권경영 실행 및 공개, 구제절차의 제공'의 4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실천.점검의무의 핵심요소라고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인권영향평가를 위해 10개 주요 분야 즉, 인권경영 체제의 구축, 고용상의 비차별, 결사 및 단체교섭의 자유 보장, 강제노동의 금지, 아동노동의 금지, 산업안전 보장, 책임 있는 공급망 관리, 현지주민의 인권 보호, 환경권 보장, 소비자인권 보호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예시하고 각 기업 별로 특화된 주요 사업별 인권지표의 구축을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실제로 인권경영을 선언하고 추진 중인 공기업들을 만나보면 다수의 기업들이 여전히 개념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부족으로 인권경영을 어떻게 이행해 나갈 지 혼선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다른 한편으로 일부 기업에서는 실질적인 이행성과보다는 외부에 보여지는 인권영향평가 체크리스트 작성과 보고서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한 가지 우려되는 바는 이런 현상이 고착화 된다면 최근 들어 확산되고 있는 인권경영선언이 원래의 취지와 다른 결과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 필자가 한국의 1000대기업을 대상으로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연간보고서 상의 인권경영관련 이행항목 보고수준과 실제 이행결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본 결과, 인권경영에 관한 보고 수준과 실제 이행 수준사이에 일관된 상관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는 역으로 향후 성공적인 인권경영의 정착을 위해서는 정부의 지속적인 정책적 뒷받침 속에 기업들의 진정한 자발적 노력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네슬레의 위기극복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중심의 기업경영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해관계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기반한 진정성 있는 실천·점검의무의 이행이라고 할 것이다. 특히 정책도입 초기 단계라 이행경험과 테크닉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인권이슈와 리스크를 파악해 나가겠다는 경영진의 확고한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다수 기업에서 CEO는 정책추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비록 단기적으로 기술적인 부족함이 있더라도 경영진이 적극적인 자세로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본질적인 인권이슈를 파악해 나간다면 효과적인 대응방향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인권경영의 확산을 위해서는 이런 선도적인 시도를 하는 기업들의 이행노력 자체를 의미 있게 평가하고 포용해 주는 정부와 사회의 인식변화도 필요하다.


초연결망으로 통합된 4차혁명 시대, 인권문제는 기업에게 효과적인 사후 대응이 어려운 리스크이자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제고해 주는 기회가 되고 있다. 사회적 통념의 틀을 바꾸는 급격한 기술적 변화와 불확실성은 기업들에게 인간의 가치를 사업활동의 근본원칙으로 하는 능동적인 전사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기업이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해 체계적인 인권경영 실천·점검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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