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의 등장과 미국 정치의 암흑시대
[전쟁국가 미국·3강-④] 매카시즘과 반공군사주의의 확립
매카시의 등장과 미국 정치의 암흑시대
1950년 2월 9일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의 공화당 여성클럽 연설에서 종이 몇 장을 흔들면서 "여기 내 손에 205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국무장관에게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명단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입안되고 있으며 국무장관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은 근거 없는 선동이었다. 초선 의원이었던 매카시는 자신의 재선을 위한 선거운동 재료로 '공산주의자의 미 정부 침투'라는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언론의 반응은 매카시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그가 휠링을 떠나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네바다주 리노, 노스다코타주 휴런을 거쳐 2월 20일 워싱턴에 복귀할 때까지 공항에는 기자들이 몰려들어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 언론은 그의 주장을 대서특필했다.

명단 공개 요구에 대해 매카시는 205명, 57명, 81명 등 수시로 말을 바꿨다. 그리고 워싱턴에 돌아와서는 국무부 내 선량하며 애국적인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국무부의 '철의 장벽'을 뚫고 마침내 어두운 비밀을 밝혀냈다고 떠벌였다. 이와 함께 1947년 시행된 국무부 충성도 심사 서류의 복사본 100장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충성도 심사 서류에는 조사 대상의 이름이 적시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명단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매카시는 이 서류의 내용을 왜곡, 날조, 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3월 8일 매카시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상원 특별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장을 맡은 민주당 소속 밀라드 타이딩스 상원의원은 "공청회 사흘이면 매카시가 상원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청문회가 진행되는 동안 마거릿 체이스 스미스 등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7명이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공직자에 대한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한 트루먼 대통령은 "냉전이 수행되고 있는 지금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방은 실제 전쟁 시 우리 병사의 등 뒤에서 총질을 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7월 14일 타이딩스위원회는 최종 보고서를 통해 매카시가 제시한 명단의 인물들은 공산주의자도 동조자도 아니며 국무부는 효율적인 안보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이것으로 매카시가 초래한 빨갱이 광풍이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중간선거직전인 9월 민주당 지배 의회가 매카란국내안보법을(법안을 발의한 패트릭 매카란 의원은 민주당 소속) 통과시킨 것이다. 이 법은 국내 안보 위기가 있을 경우 불순분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예비검속 할 수 있게 한 악법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법안이 "1798년의 선동금지법 이래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에 가세해 거부권을 무력화시켰다.

나아가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에서 28석, 상원에서 5석을 늘리는 대승을 거두었다(195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1948년 민주당에 빼앗긴 다수당 지위를 탈환하지는 못했다). 특히 매카시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결론 내렸던 타이딩스 의원은 공화당 후보에 패배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매카시가 직접 나서 타이딩스가 "공산주의자들을 보호하고" "반역자들을 엄호"했다고 비난한 때문이었다.

이로써 매카시는 언터처블이 되었다. 미국 유권자가 매카시의 손을 들어준 때문이다. 공화당 입장에서 매카시는 당의 총선 승리를 가져온 보배로운 존재가 됐다. 공화당 내에서는 누구도 매카시에 공개적으로 도전할 수 없게 됐다.

심지어 트루먼 대통령조차도 빨갱이 사냥의 광풍을 거스를 수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행정명령 10241호를 통해 공무원의 해직 조건을 넓혔다. 즉 안보 상 중요한 정부기관에서는 충성도 심사를 통과했더라도 안보 위험을 이유로 소속 공무원을 해고할 수 있게 했다. 예컨대 동성애자, 알콜중독자 등은 이 사실을 밝히겠다는 공산주의자의 협박에 못 이겨 간첩 행위를 할 수 있으므로 안보상 위험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너무 많은 조사대상자들이 재심을 통해 구제된다는 매카시의 불만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같은 달 대법원은 충성도 심사가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또한 의회도 공법 733 제정을 통해 안보 위험을 이유로 한 공무원 해직을 합법화 했다. 이로써 미국의 입법, 행정, 사법부 모두가 빨갱이 공포에 굴복한 셈이다.

매카시즘이 가능했던 세 가지 이유

매카시즘이란 정치적 광기를 만들어낸 원인은 무엇일까?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1947년 이후 꾸준히 증대해온 국내외 공산주의에 대한 미 국민들의 공포, 둘째 1933년 이후 백악관을 장악하지 못한, 특히 1948년 대선에서 예상 밖의 패배를 당한 공화당의 무분별한 정치 공세, 마지막으로 유력 정치인의 발언이라면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전달하는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행태 등이다.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마케팅은 민주당도 공화당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민주당은 소련이라는 외부의 위협을, 공화당 국내 공산주의의 위협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1그런데 1949년이 되면서 공산주의의 위협은 점점 더 현실적이 돼갔다. 8월 소련의 핵실험과 10월 중국의 공산화가 그것이다.

미국은 자신의 핵 독점이 10년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불과 4년 만에 깨졌다. 동아시아 지배의 핵심 파트너로 지목했던 국민당 정권도 대륙에서 패퇴했다. 이로써 전후 미국의 세계 전략에 중대한 차질이 발생했다. 미국의 핵 패권이 무너지고 지역 파트너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일반 국민들은 핵무기의 공포를 실감하게 됐고 정책담당자들은 소련에 대한 전략적 우위의 상실을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이 아무리 세계 최강국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외부 정세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공화당을 비롯한 미국의 보수 세력이 자신들의 소망과는 다른 세계정세 변화의 원인을 내부 배신자의 소행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이들은 소련이 예상보다 빨리 핵무기를 갖게 된 것도, 중국이 공산화된 것도 국내의 배신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 1월부터 내부 배신자 색출이 본격화 된다. (이때 민주당은 소련의 도전을 제압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을 관철시키기 위한 청사진 마련에 들어간다. NSC-68이 그것이다.)

1950년 1월 25일 전 국무부 관리 앨저 히스의 유죄 확정이 결정적 전환점이다. 1948년 8월 간첩 혐의로 기소된 히스는 두 차례 재판 끝에 이날 위증죄로 5년 형을 선고받고(간첩죄는 공소 시효가 지남) 이후 44개월을 복역한다.

뉴딜주의자인 히스는 유엔 창설에 깊게 관여한 인물이다. 유엔 창립을 논의한 1944년 덤바튼 오크스 회의에서 집행 간사를 맡았고 1945년 4-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창립총회에서 사무총장을 맡았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 참여했으며 이전에는 코델 헐 국무장관의 극동담당 특별보좌관인 스탠리 혼벡의 보좌관으로 중국정책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간첩 혐의와 관련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은 공화당의 '내부 배신자 프레임'을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히스의 유죄 확정을 전후해 핵무기 비밀과 관련한 두 건의 간첩 행위가 발각됐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독일계 영국 물리학자 클라우스 훅스가 영국에서 체포됐고, 미국에서는 줄리어스와 에델 로젠버그 부부가 체포됐다. 훅스의 정보 유출은 소련의 핵개발을 2년 정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중대한 간첩 행위였다.

반면 평범한 시민이었던 로젠버그 부부의 경우는 평가가 엇갈린다. 남편인 줄리어스만이 간첩 행위에 가담했으며 그나마 소련이 이미 알고 있던 정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당시 아인슈타인과 러셀 등을 비롯해 세계적인 구명운동이 있었으나 이들 부부는 1953년 6월 사형을 당한다. 미국에서 평화 시 간첩죄로 사형 당한 최초의 민간인이다.

당시 담당 판사는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에 원자탄 비밀을 넘겨줌으로써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을 가능케 했고, 미군 5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으며, 앞으로 수 백 만 이상의 선량한 시민들이 그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이들의 행위는 "살인보다 더 나쁜 죄"라고 비난했다.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


또한 1950년 1월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Who Lost China?)' 논쟁이 본격화된다. 보수파 언론인 조셉 알솝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발표한 같은 제목의 3부작 칼럼이 기폭제였다. 요지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한 것은 미국 정부가 충분히 돕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국무부가 국민당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민당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것으로 정확한 진단은 아니었다.

2차 대전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존 페이튼 데이비스와 존 스튜어트 서비스 등 국무부 관리들은 연안의 중국 공산당과도 접촉했고 이미 1944년부터 공산당의 승리를 예견했다. 또한 민족주의 성향의 중국 공산당은 소련보다는 미국과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보고했다. 즉 마오쩌둥은 아시아의 티토가 될 수도 있으며 미국은 공산 중국과의 제휴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후 트루먼 행정부는 1946년 마셜 장군을 특사로 보내 국민당 주도의 국공 합작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1947년 초가 되면 사실상 중국을 포기한다. 국민당의 집권을 위해서는 수십만의 미 지상군을 파견해야 하는데 이는 미국의 국력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국무부 관리들의 중국 정세 분석은 정확했고, 중국의 공산화는 미국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중국 포기는 불가피했으며 사실 현명한 정책 판단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 세력은 트루먼 행정부와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들은 미국 정부가 얄타회의 때부터 소련에 지나치게 양보해 동유럽과 중국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보는 국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얄타밀약설'이다. 보수 세력의 이러한 음모론에는 공화당 등 보수 정치인들에 대한 중국국민당의 엄청난 뇌물 공세도 한몫을 했다. '차이나 로비(China Lobby)'가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매카시가 '국무부 내 공산주의자 침투'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이다. 미국의 핵 독점 상실이 내부 첩자의 간첩 행위 때문인 것으로 드러나고 전직 국무부 관리가 소련의 첩자였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내부 배신자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포는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 중국의 상실도 내부 배신자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트루먼의 재선과 공화당의 반공 공세

여기에 1948년 대선 패배에 대한 공화당의 깊은 좌절감이 더해졌다. 이 선거는 미국 대선 역사상 최대 이변으로 꼽힌다. 공화당 후보 토마스 듀이의 승리가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트루먼이 간발의 역전승을 거두었다. 투표 4주일 전 미국의 저명한 정치 기자 50명 전원이 듀이의 승리를 예상했다. 모든 여론조사, 모든 정치평론가도 같은 결과를 예상했다. 선거 다음 날 '듀이 당선'이 보도된 신문이 있을 정도로 트루먼의 승리는 예상 밖이었다. 그만큼 공화당은 좌절도 컸다.

1948년 대선 때까지 공화당은 트루먼 행정부에 대한 직접적 공격은 삼갔다. 그러나 예상 밖의 패배를 당한 이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면 공격에 나선다. 16년간 백악관을 장악하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백악관 탈환에 실패한 좌절감이 폭발한 것이다. 그것은 비이성적이고도 무책임한 정치 공세였다. 매카시가 그 포문을 연 셈이다.

공화당 하원의원 닉슨은 히스의 유죄가 확정된 데 대해 이는 "미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충격적 간첩 행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윌리엄 힐 하원의원은 "공산주의자들이 고위 공직에 대거 진출했음을 확인했다. 이는 확실하게 입증됐다"고 선언했다.

칼 문트 하원의원은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미국의 대외정책을 망치고 있는 친소 성향의 연방 공무원을 색출하라"고 요구했다. 해롤드 벨데 하원의원은 소련 첩자가 미국 전역을 휘젓고 다니고 있다고 주장했고 로버트 리치 하원의원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스탈린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시사했다.

공화당은 또한 1950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채택한 당 강령을 통해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하면서 "공산주의 성향 공무원들에 대한 현 정부의 유약한 태도"를 비판했다.

"애치슨도 마셜도 빨갱이다"

심지어 매카시는 1951년 6월 14일 상원 연설에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이자 공직자인 조지 마셜 국방장관까지 공격했다. '중국의 상실'은 마셜의 책임이며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음모로, 이 추악한 음모의 전모가 밝혀질 경우 그 주모자는 모든 선량한 시민의 영원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마셜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육군 참모총장 출신으로 전후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또한 마셜플랜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이룩한 공로로 195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실 애치슨과 마셜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을 완성했고, 이 때문에 냉전 시대의 '현인들(Wise men)'로 추앙받는다. 미국 패권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광기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애치슨은 공산주의에 가장 강경했던 사람으로 압도적 군사력으로 소련을 봉쇄한다는 NSC-68은 그의 주도 아래 작성, 추진됐다. 봉쇄 전략의 주창자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조지 케난이 냉전의 군사화에 반대하자 그를 해임한 것도 바로 애치슨이었다. 애치슨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비판한 매카시에 대해 '원시인의 공격'이라고 경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1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공화당의 주장은 미 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1952년 공화당이 백악관을 장악한 이후에도 매카시즘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매카시즘이 무책임한 정치공세라는 사실을 알 만한 공화당 정치인들조차 이를 방조하고 묵인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공화당의 양심이라는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도 침묵을 지켰다. 매카시즘이 공화당에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1944년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존 브리커는 매카시를 "지뢰밭을 누비는 멧돼지"에 비유하면서 "조, 자네는 정말 진짜 개새끼일세. 하지만 추잡한 일을 위해선 개새끼가 필요할 때가 있지"라고 말했다. 이는 당시 공화당 정치인들의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도 한몫을 했다. 언론은 유력 정치인의 발언이라는 이유로 매카시 등의 폭언을 아무런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 적기에 바빴다. 당시 미국 언론은 빨갱이 사냥의 나팔수였던 셈이다. 매카시의 전성시대는 미국 정치의 암흑시대였고 미국 언론의 치명적 오점이었다.

매카시의 몰락

매카시의 무차별 빨갱이 사냥에 대해 최초로 진지한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 것은 CBS의 방송인 에드워드 머로였다. 그는 1954년 3월 9일 방영된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에 대한 한 보고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매카시의 발언을 검증했다. 예컨대 민주당 집권 기간(1932-52년)은 '반역의 20년'이었고, 시민단체 미국민권연맹(ACLU)은 공산당의 전위조직이라는 매카시의 비난은 과연 근거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머로는 결론 부분에서 "매카시의 주요 업적은 대중으로 하여금 외부 공산주의의 위협과 내부 공산주의의 위협을 혼돈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견이 곧 불충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비난이 곧 그가 잘못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잘못에 대한 처벌은 증거와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며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공포에 휘둘려 비이성의 시대로 떠밀려가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매카시가 빨갱이 사냥의 첫 포문을 연 후 무려 4년 1개월 만에 처음으로 언론의 진지한 대응이 나온 것이다. 2006년 개봉된 조지 클루니 감독의 <굿 나이트 앤 굿 럭>은 매카시즘에 대항한 언론인 머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매카시는 한 달 후 같은 프로그램에서 반론을 펼쳤으나 담당 기자를 소련 첩자로 몰아붙이는 등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게다가 이 해 봄부터 미 육군에 대해서까지 빨갱이 색출을 위한 청문회를 벌이면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1954년 1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매카시 지지 50%, 반대 29%였으나 6월에는 지지 34%, 반대 45%로 역전됐다.

1954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을 탈환하면서 매카시는 이제 공화당의 보배가 아니라 짐이 됐다. 1954년 12월 2일 의회는 "상원의원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매카시에 대해 견책 처분을 내렸다(65대 22). 청문회에 출석한 군 장성을 모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공주의가 견책의 이유는 아니었다. 즉 의회의 견책으로 매카시즘이 극복된 것은 아니었다.

매카시는 1957년 5월 2일 과도한 음주에 의한 간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1950년 2월부터 1954년 12월까지 5년 가까이 빨갱이 사냥을 무기로 미국 정치를 뒤흔들었던 매카시는 공화당과 대중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쓸쓸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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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