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피해 배상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김시덕의 직업적 책읽기] <소년들의 섬 - 이민선 기자의 선감도 르포르타주>
선감학원 피해 배상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이민선 <소년들의 섬 - 이민선 기자의 선감도 르포르타주>(생각나눔, 2018)

며칠 전, 서울 서대문구립 이진아 도서관에서 서울과 수도권의 근현대사를 강연했다. 그 후 수강생들과 함께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仙甘島)를 방문했다. 이곳은 한때 이름 그대로 섬이었지만, 시화호 간척으로 인해 현재는 육지와 연결되었다. 사방이 땅으로 둘러싸인 현재의 경관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선감도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낙도였다. 당시 이곳에서는 현대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국가 폭력 사건이 자행되었다.

선감도에는 주로 서울 지역에서 끌려온 이른바 ‘불량아·부랑아’를 수용하는 선감학원이라는 일종의 소년 보호소가 있었다. 사람들의 눈이 미치기 어려운 이 낙도에서, 각기 억울한 사연을 지닌 채 끌려온 숱한 소년들이 학대를 당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2년에 설립되어 3년간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던 이곳은 해방 후에 일제잔재로서 폐지되기는커녕, 경기도가 운영하는 기관으로서 오히려 그 규모를 키워갔다. 그리하여 선감학원은 식민지 시기에 운영된 기간보다 12배 더 긴 36년간 운영되다가 1982년에야 폐쇄되었다.

해방정국과 한국 전쟁이라는 혼란기에는 실제로 부랑아들이 발생했으므로 이런 기관이 존재한 것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하자. 전쟁의 혼란이 진정된 뒤에도 이 기관을 존속시키고, 사회 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멀쩡히 집과 가족이 있는 소년들을 납치해서 낙도에 가둔 것은 명백한 국가 폭력이다. 생존자들은 "세상이 내게 왜 그랬지?"(119쪽), "국가가 내 인생을 망쳤다."(122쪽), "대한민국이 나를 고아로 만들었다. 서울시, 경찰청, 그리고 선감학원을 운영한 경기도가 정말 나쁘다."(213쪽) 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생존자들이 가리키는 세상·국가는 한국 정부다. 

1942~45년의 식민지 시대에도 이곳에서 희생당한 조선인 소년들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46~82년 사이에 선감학원을 운영한 한국 정부는, 이보다 훨씬 오랫동안 훨씬 많은 수의 한국인 소년을 학대하고 죽였다. 선감학원의 희생자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증거로서 추모하는 사업을 진행하던 안산시가, 실제로 정체를 드러낸 생존자들이 일본 제국주의가 아닌 한국 정부에 의한 국가 폭력을 폭로하자 경기도에 책임을 떠넘기고 발을 빼버린 사실은 이 사건이 현대 한국 사회에 감추어져 있던 가장 끔찍한 비밀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 정부가 이런 일을 자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래 인용하는 1954년 3월 18일자 <동아일보> '휴지통' 코너에 실린 글로 대표되는 사회 일반의 폭력적 분위기가 있었다. 국가의 강압적 행태와 시민의 방관 내지는 조장이 결합됨으로서, 선감학원이라는 괴물이 수 십 년간 한국 사회에 존재할 수 있었다.

"서울경찰국에서는 명랑한 서울 거리를 만들기 위하여 17일 아침부터 시내를 배회하는 부랑아 거지들을 일소하게 되었다나. 서울 경찰당국의 금번 단행한 조치는 수도 서울의 체면을 위하여서도 다행한 일이며 응당 있어야 할 일. 그러나 항시 거리에 부랑아나 나병환자들을 붙잡아 간 후 며칠 아니면 다시 거리로 터져 나오는 과거와 같은 일이 이번에는 없어질 것인지 두고 봐야 할 일. 오늘 붙잡아 가는 것이 내일이면 다시 거리에 못 나오도록 서민들은 경찰당국에 꼭 부탁하오!" (<자취감춘 부랑아>(선감역사박물관, 2018) 44쪽)

이렇듯 국가 기관에 의해 서해의 낙도로 납치되어 폭력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소년들은, 섬을 탈출해서 먼 곳에 있는 육지로 가기 위해 섬 주변의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숱하게 죽었다. 죽은 아이들은 선감학원 주변의 공동묘지에 암매장되었다. 관련기록이 애초에 작성되지 않았거나 파기되었기 때문에 누가, 몇 명이나 죽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생존자들은 최소한 300명 이상이 죽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몇 년 전 암매장지를 발굴했을 때에는 10여살 소년의 작은 뼈 몇 개와 꽃신이 나와서 이곳에 묻힌 소년들의 사망 당시 나이와 영양 상태를 짐작케 했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배가 고팠거나 고통을 못 이겨서 모포를 입에 문 채로 죽었다고 한다.

▲ 암매장지에 대해 설명하는 생존자 대표 김영배 선생. ⓒ김시덕


바다에 빠져 죽지 않고 운 좋게 주변 섬에 도착한 소년들은, 섬 주민들에게 협박받아 머슴처럼 일했다고 한다. 임지현 선생이 제시한 '대중 독재'라는 개념과 같이, 이들 소년을 격리되어 마땅한 부랑아로 취급하고, 머슴으로 부린 한국 시민은 독재 정권의 소극적·적극적 동조자였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근(선감도 인근 섬)에 사는 주민들도 한통속이었던 것 같아요. 도망친 아이를 발견하면 차비를 빌려주거나 해서 집으로 돌려보낸 게 아니라, 붙잡아서 자기 집 머슴으로 부려먹기도 했어요. '돌아가서 맞을래, 우리 집에서 일할래?' 이런 식이었죠. 그분들(주민들)은 그게 당연하다 생각한 것 같아요. 만나보면 '그때는 다 어려워서 그랬어요'라고 어이없는 대답을 합니다." (18쪽)

국가 폭력의 현장에서 어렵사리 탈출한 소년들은, 자신의 부모형제는 물론 자기 이름과 나이도 잊어버린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국가 폭력의 타깃이 되었다. 당시의 경찰관 등은 부랑아 검거 실적을 올리기 위해, 멀쩡히 자신을 돌봐주는 부모형제가 존재하는 아이들을 납치했다.  그들은 소년들이 몇 년 전부터 역 앞에서 구걸하고 있었다는 거짓 서류를 작성했고, 가짜 이름을 붙였고, 선감학원의 창립일인 5월 29일을 그들의 생일로 일률적으로 정했다. 워낙 어린 나이에 납치되어 장기간 폭력에 노출된 소년들은, 선감학원을 빠져나온 뒤에도 가족을 찾을 실마리를 잃어버린 채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떠돌았다. 그리고 국가는 이들을 또 다시 형제복지원·삼청교육대·청송교도소 등에 잡아넣었다. 이런 믿기지 않는 사례들이 올해 출간된 생존자 증언집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 -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구술 기록집>(오월의봄, 2019)에는 빼곡히 담겨 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국가의 폭력에 시달린 소년들은, 세월이 한참 흐른 최근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억울함을 사회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안산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인 안산지역사연구소가 이들의 존재를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침묵해온 생존자들이 하나 둘 정체를 드러내냈다. 이번에 선감도를 방문했을 때 사건 현장을 안내해주신 '선감학원 아동 국가폭력 피해 대책협의회' 회장 김영배 선생 등은, 얼마 전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면담했다고 알려주셨다.  사건의 해결을 향한 노력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간 뜻있는 여러 분들의 노력에 힘입어서 선감학원 사건 자체는 어느 정도 세상에 알려졌지만, 여전히 사건의 전모와 책임 소재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고, 사망자 및 생존자 보상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앞서 말한 소년의 꽃신이 전시되어 있는 선감역사관도 현재 운영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아 격일로 개관하는 실정이다. 소년들이 잠을 자던 숙소와 집단으로 식사하던 식당 건물, 의무실 건물 등이 선감역사관 근처에 그대로 남아 있지만, 아직 이들 건물 및 토지 매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국가 폭력의 증거인 이들 건물들이 사라짐으로써 선감학원의 기억이 잊히기를 바라는 자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 선감학원 희생자 위령비. ⓒ김시덕


사건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으니 이제는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1956년 8월 31일자 <경인일보> 기사 '부랑아 수용에 이상(異狀), 희열보다 비애가 커지는 아방궁 - 기아에 떠는 원생', 1963년 7월 12일자 <경향신문> 기사 '과잉 단속이 빚은 빗나간 아동 복지 - 당찮은 부랑아로 - 보호소 전전 8개월 만에 애태운 부모 품에' 등 이미 1950~60년대부터 선감학원의 심각한 운영 행태가 기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감학원은 수십 년을 더 존속하다가 1982년에야 폐쇄되었음을 생각하면 결코 안심할 수 없다.

"길을 잃고 방황하다 불량아 단속에 적발되어 아동보호소를 전전긍긍하던 12세 소년이 그를 찾아 헤매던 부모들과 8개월 만인 11일 하오 5시 극적인 상봉 후 그리던 집으로 돌아갔다. 62년 12월 어느 날 저녁 9시경 서울 서대문구 향촌동 2~2(21호) 조근호 씨(42)의 장남 경일(12•매동국민학교 5년생) 군은 아주머니의 심부름으로 서대문 우체국에 편지를 부치러 나갔는데, 우체국을 찾지 못한 경일군은 서울역까지 오게 되어 역 광장에서 12시까지 방황하다 불량아 단속에 적발되었다 한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경일군은 숱한 불량아들 틈에 끼여 녹본리 아동보호소에 수용, 1주일 후에는 선감학원으로, 다시 4개월만인 지난 3월 29일 수원 혜광원으로 이송되어 수용 중 이날 아버지 어머니(이춘자)와 극적인 상봉으로 그리던 서울 집으로 돌아갔다." (<자취감춘 부랑아>(선감역사박물관, 2018) 58-59쪽)

사건의 진실이 파헤쳐져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고, 피해자 보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 시민은 선감학원 문제를 끈질기게 국가에 제기해야 한다. 유부도 사건, 서산간척단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미군 기지촌에 납치된 여성들... 한국 사회에는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피해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 폭력의 사례가 숱하게 존재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같은 사례도 잊히면 안 된다. 현대 한국 정부에 의해 일어난 이런 사건들을 하나하나 직시하고 해결한 뒤에야, 한국 시민은 비로소 세계 다른 나라들에 떳떳하게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책임을 추궁할 수 있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 <소년들의 섬>(이민선 지음) ⓒ생각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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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문헌학자, 전쟁사 연구자, 서울답사가. 작게는 시군구(市郡區)에서 크게는 국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집단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직업적으로 책·논문·기사를 읽는 중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는 좋은 글을 발견할 때마다 서평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