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천만 시대, 매뉴얼보다 시급한 필독서는
[프레시안 books] 박평종의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
디카 천만 시대, 매뉴얼보다 시급한 필독서는
우리 인류는 언제부터 예술이라는 것을 했을까? 원시예술을 판별하는 기준에 의하면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보다 과장이나 과감한 생략과 같은 추상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아마도 최초의 예술은 분명 언어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들의 언어를 재생할 수 없다. 이후 나왔음직한 분명한 예술을 독일의 영화감독 베르너 헤어조크의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에서 발견할 수 있다.

1994년 프랑스 남부 아르데스 협곡, 3만2000년 전 인류의 꿈을 고스란히 간직한 신비로운 동굴 하나가 발견된다. 탐험대장의 이름을 따라 쇼베 동굴로 명명된 그 곳에는 동굴곰, 털코뿔소, 매머드 등 멸종된 희귀동물의 모습들을 그려낸 300여점의 원시예술 벽화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 그림들은 과장과 과감한 생략을 구사한 분명한 원시예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영화 <잊혀진 꿈의 동굴> 중. ⓒmovie.naver.com

예술이란 뭔가?

인류가 5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후, 각 지역에서 남긴 예술을 볼 수 있다. 언어, 춤, 음악은 추정하기 힘들지만 동굴의 벽화와 각종 조각품들은 그들이 상당한 수준의 미적인 창작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들 창작자는 언제부터 전문가 또는 전업 예술가가 됐을까? 추정해볼 수 있는 단서는 진화심리학자들이 제공한다.

이들은 인류가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기 위해 몇 가지 능력을 진화시켰다고 한다. 하나는 폭력적인 신체의 권능이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코난>에서 나오는 바바리안이 그 능력의 전형이다. 또 하나는 집단과 함께 탄생한 정치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언어 능력이다. 말 잘하는 정치인들 곁에 여성들이 끓는 것은 비단 요즘 일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예술적인 능력이다. 어쩌면 이들은 전자들보다 힘이 더 강력한데, 유전자 복제를 제어하는 도덕적인 관념이 더 희박하다는 데 이유가 있다. 어찌되었던 이들은 일상의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 프로가 탄생하는 것이다. 직업 군인, 직업 정치가, 직업 예술인. 따라서 일상의 노동을 영위하면서 이들을 따라잡기란 그리 녹록치 않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 1000만대('폰카'와 '똑딱이'를 제외하고도) 시대의 한국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유명 관광지와 명소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보다 들지 않은 사람이 희소하다. 사진 비평가 박평종은 "글을 잘 쓰거나 그림을 잘 그리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오랜 훈련 필요하고 게다가 재능까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사진을 잘 찍기란 글이나 그림에 비해 한결 수월하다. 물론 시작 단계에서만 그렇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문인이나 화가가 되겠다는 꿈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가 이번에 낸 책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달콤한책 펴냄)는 독일 사진가이자 이론가였던 지젤 프로인트가 1974년 펴낸 <사진과 사회> 맨 마지막장에서 언급한 '포토마추어'라는 개념을 확장해 디지털 기술 발전으로 급격히 확장된 사진 아마추어를 고찰한다. 그가 파악하는 '작가를 꿈꾸는 아마추어 사진가'는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사진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대개 고개를 가로저을" 사람들이다. 단지 '사진작가'라는 지위가 덤으로 따라올 때만 수용한다.

그렇다면 '아마추어 사진가의 미래'는 무엇일까? 저자는 비관적으로 단사진 위주의 공모전 사진을 버릴 때에만 예술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예를 작고한 아마추어 사진가 전몽각(1931~2006)의 <윤미네 집>(포토넷 펴냄)에서 찾는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사진을 붙잡고 있을 용기 없는 아마추어는 '사진으로 축소된 세계'인 사진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 온 후 보여주는 사진이란 "동남아시아나 인도 혹은 중국의 일부 지역처럼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여행 할 경우에 타자화의 시각이 두드러진다. 반대로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에서 촬영한 사진은 동경과 선망이 섞여 이상화된 형태로 구현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니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다"라고 푸념한다.

우울한 사진가들

이쯤 되면 아마추어 사진가들 역시 푸념을 할만도 하다. 작가는 뭐가 그리 잘나서 이리도 어려운 것이냐? 따라서 자신의 수준에서 도달 가능한 사진작가의 상을 만들어 몇몇 작가에게 투영한다. 그들이 시쳇말로 'B급 작가'다. 원래 그 뜻을 몰랐던 저자는 어느 전시기획자에게 들었다고 한다. B급 작가란 "대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지만 전문가 집단에게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작가"를 뜻한다고. 그 예가 '제주도'를 찍은 김영갑(1957~2005)이나 '인간'을 찍은 최민식(1928~2013)이다. 하지만 그는 다르게 해석한다. "B급 작가들이 보편적인 가치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주어진 가능성의 바깥으로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는 인간은 성장을 멈춘 존재나 다름없다"고 예술의 본질을 갈파한다.

하지만 그러한 저자의 믿음과는 달리 전설이 되어버린 작고한 사진가나 B급 작가의 '유명 사진전'은 대중 몰이를 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들은 지나친 관객 몰이를 하며 상품이 된다. 매그넘 소속의 작가들을 초청해 전시와 책 출판 등을 대규모로 진행한 <매그넘 코리아> 프로젝트는 "한 달 남짓, 혹은 보름 정도 한국에 머물며 '코리아'를 담았다. 그 사진들은 결국 한국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남게 될 것이므로, 그리고 서양에서 한국을 이해하는 담론의 체제를 구성하게 될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의 성격을 띤다." 이어서 덧붙인다. "이 서양의 거장들이 사실 여행자 입장에서, 구경꾼 시각에서 '코리아'를 찍었다. 그렇다면 구경거리가 된 우리가 그 사진을 보면서 열광하는 것은 우습다." 그러한 대규모 전시회는 정작 우리 전시 문화나 작가들의 성장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 이제부터 우리 사진가들은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사실 요즘은 예술 사진가들이 '전시'를 통해 사진의 담론을 장악한 듯 보이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사진은 주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장이었다. 대규모 전시로 짭짭하게 장사하는 사진가들은 거의 포토저널리트들이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버트 카파 등등. 그들은 강력한 대중매체를 장악하고 있었고 전시장에서도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요즘은 매체의 내부나 외부에 존재하는 포토저널리스트 모두 담론의 힘을 잃었다. 그래서 우울하게도 이사람 저사람 전시장을 기웃거린다.

이에 대해 박평종은 "매체를 버리고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저널리즘 사진은 그런 점에서 자기모순이다. 매체 환경의 변화에 맞서 적극적인 변화를 해도 모자라는 판에 매체를 버리고 '보수적인' 전시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안이한 태도"라며 "전자 매체와 더불어 포토저널리즘의 새로운 황금기가 오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우울하다. 이제 매체는 사진의 홍수 속에서 사진 전문가의 지위를 박탈했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사진 상(賞)과 작가 지원'에 매달린다. 요즘의 사진 상은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 상금으로 그 권위를 만들려 하는 경향이 크다. 돈도 좋지만 수상자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작업해 온 것은 아니다. 지원제도 역시 실질적인 지원보다는 "수상자가 되었으니 앞으로 혜택이 올 것이다"라는 추상적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이번에 수상자에게 현금 3000만원을 지급하는 '최민식 사진 상'이 그렇다. 사진가 최민식 선생의 사후 제정된 이번 사진 상은 일단 상금에서 국내 최고, 국외에서도 예가 별로 없을 정도로 높다. 방법은 콘테스트다. 일정 요건을 갖춘 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심사를 통해 수상이 확정된다. 그런데 그 일정 요건이라는 것이 '최민식의 사진 철학을 지향하며 휴머니즘을 찍어야 한다'라고 한다. 상금도 좋지만 그 철학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지원을 해도 양심을 속이는 일이다. 이에 사진계의 전문가 그룹이 B급으로 못 박은 최민식을 기리는 상이 자기분열에 빠진다. 한국의 최고 사진 전문가들이 지원하길 기대하지만 사실은 최민식의 최대 지지자들은 사협(한국사진작가협회)이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다. 실제 그들이 대거 지원하고 있다. 직업으로 사진을 하고 있는 이들은 또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을 향한 글쓰기의 괴로움

▲ 저자 박평종. ⓒ이상엽
박평종의 책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는 1부 사진가의 시선, 작가의 윤리와 2부 우리 사진의 풍경과 역사, 그리고 3부 사진가의 우울한 전성시대로 나뉘어 있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3부가 핵심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쟁점들 외에도 사진 저작권이나 초상권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그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프랑스에서 미학으로 박사를 받고 귀국해서 10년 동안 이론서와 작가론을 몇 권 냈지만 평론집이 두 권이라는 것은 글 쓰는 이로서 의외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아마추어 사진가 1000만에 디지털 카메라의 엄청난 보급, 매뉴얼 출판시장의 확장과는 별도로, 여전히 수년 동안 대형서점 서고에 사진평론집 한 권 꼽지 못하는 것이 한국 사진계의 현실인 것이다. 게다가 사진전을 관람하는 것은 고사하고 보도자료 쓱 보고 자신은 잘 이해 못하겠다며 '사진이란 이런 것'이라는 훈계조의 인상 비평을 버젓이 신문에 싣는 현실이다. 그러니 수년간 사진에 대한 글을 쓰고 모아서 평론집을 세상을 선보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책을 보는 내내 우울했다. 사진계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내부에서는 드러내놓고 말하기 힘들었던 아픈 부분이 거의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읽는 독자를 필자의 의도대로 우울하게 만들었으니 걸작이라는 상찬은 못해도 수작은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사진 찍는 수많은 이들이 이 책을 외면한다면, 그의 책 마지막 칼럼 "'타인의 고통'과 사진 찍기의 괴로움"처럼 그에게는 '사진가의 우울'과 글쓰기의 괴로움이 될 것이다. 부디 많이들 읽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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