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절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전통'으로 포장된 가부장주의에 지쳐 명절 '보이콧'하는 세대
2020.01.24 00:37:54
나는 명절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인천 송도에 거주하는 40대 오세영 씨. 결혼 10년차인 그는 올해 설부터 시댁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발단은 지난 추석 때였다. 몸이 안 좋았던 오 씨를 도와 설거지를 하던 남편을 시어머니가 부엌에서 끌고 나간 것이다. 오 씨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나를 쏘아보던 시어머니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며 "결국 이번 명절부터는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오 씨는 매번 명절을 치를 때마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고 했다. 학원 강사인 그는 "며칠은 강의가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 씨를 더욱 힘들게 한건 육체 노동이 아니었다. "몸이 힘든 것보다 정신이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파출부가 된 느낌이에요. 일 할 사람 필요해서 며느리를 들였나 싶고. 몸이 힘든 거 보다 그게 제일 커요. 가족들은 많이 먹어서 배부르다는데 정작 그 음식 한 나는 편하게 끼니도 못 챙기고. 저는 딸 하나 있는데 시부모님은 아들이 없다고 아쉬운 티를 내세요. 그럴 때면 저는 또 속에서 천불이 나요. 이런 거 저런 거 쌓여서 명절 끝나면 꼭 남편이랑 싸워요"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는 결혼 2년차 새댁 서지수 씨도 마찬가지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을 다니는 서 씨에게 결혼 후 맞은 첫 명절은 아직도 당황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서 씨는 "가족이라고 하는데 가족 중 누구도 '나'한테 관심이 없다"며 "주어진 일만 제대로 하면 되는 그런 존재였다"고 말했다. 서 씨는 이를 "나 자신이 지워지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부엌에서 거의 나오지를 못했어요. 음식 준비하고 과일 깎고 있는데 거실에서는 다른 가족들 웃음소리가 들리고. 내 역할과 용도가 너무 분명한 거에요.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이 있고 저는 그들의 편안함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거죠. 제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게 아니라 이들 가정에 편입된 거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서 씨는 "남편에게도 괜히 서운해지더라"라며 "남편과 상의 끝에 이번 명절에는 남편과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 씨는 "굳이 명절에 나 자신을 소모하지 않더라도 효도하는 방법은 있을 것"이라며 "우리가 만든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명절이 고된 건 미혼도 마찬가지다.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이미주 씨는 "이꼴저꼴 보기 싫어서 안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어른들 잔소리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게 명절마다 달라지지 않는 풍경"이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 씨는 최근 몇 년간의 페미니즘 열풍의 중심에 있던 '영영 페미니스트' 세대인 90년대 생이다. 또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고 종종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한다. 직장에서 누군가가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면 이를 지적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들은 쉽지 않다.

이 씨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분위기가 정말 많이 바뀌었다"면서도 "사회도 느리지만 그런 부분이 조금씩 반영되고 변하는 것 같은데 집은 아닌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사회가 갈 길이 멀구나' 하는 걸 명절에 제일 많이 느껴요. 나이 많은 어른들은 생각을 바꾸고 달라지기가 어렵잖아요. 매번 지적하고 싸우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대가족이 모인 곳에서는 항상 여자들은 부엌에서 일만하고 남자들은 먹고 쉬고. 남자 어른들도 그렇지만 여자 어른들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요. 어쩔 수 없지, 너도 시집가면 다 똑같다 그런 식이니까 저는 더 답답한 거에요"

이 씨는 이번 설에는 어머니와 여행을 가려고 했다. 어머니를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이 씨의 어머니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이 씨는 "엄마가 할머니 눈치를 보시는데 마음이 너무 안 좋았다"며 "피해 당사자인 엄마와도 싸우게 되니 자리를 피하는 것을 택했다"고 말했다.

명절을 맞이할 때마다 성별갈등과 세대갈등이 반복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명절 제사 없애주세요'라는 청원이 등장할 정도다. 개인의 행복과 평등함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에게 명절은 언젠가부터 '위계를 확인하는 불편한 자리'로 각인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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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은 기자 p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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