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강간죄다"
여성계 "'폭행·협박' 수반하지 않아도 강간죄 적용해야"
2019.09.18 15:45:24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강간죄다"
"내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저항하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았어요."
"평소에도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물건을 부쉈어요. 거절하면 맞을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이상한 짓 안 할게, 치킨만 먹고 TV만 보다가 가자, 쉬러 가자고만 했어요"

위와 같은 상황은 형법상 강간죄에 해당할까. 피해자들은 분명 '원치 않은 성관계'였다는 점을 밝히고 있지만 형법상 강간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법원은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폭행 또는 협박'의 정도를 매우 좁게 해석한다. 상대방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수준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음이 입증돼야 한다.

그러나 지난해 시작된 '#미투 운동'을 통해 알려진 성폭력 사건은 대부분 물리적인 폭행이나 명시적인 협박을 수반하지 않는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여성인권운동단체들은 1991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 당시부터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개정하도록 촉구해왔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가 18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가자들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여부로', '국회는 강간죄 개정으로 시대요구에 응답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프레시안(조성은)


강간죄의 엄격한 적용이 '피해자 꽃뱀몰이'로 악용

전국 208개 여성인권운동단체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가 18일 서울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폭행 또는 협박'을 조건으로 한 현행 강간죄 성립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연대회의는 성명서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성폭력을 당했어도 우리 법이 인정하는 성폭력에 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며 "그럴 경우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를 입증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폭력과 같이 피해자에 대한 의심이 뿌리깊은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어도 그걸 입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고혐의를 받고 거꾸로 수사대상이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가해자 측에서 이런 현실을 악용해 피해자를 입막음하기 위해 무고 가해자로 몰아가는 일이 쉽게 발생한다"고 말했다.

연대회의는 "우리 법이 성폭력의 범위를 좁게 인정하는 것이 결국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명예훼손, 무고 등으로 역고소 하겠다는 위협의 바탕이 된다"며 "실제로 성폭력 무고로 처벌받는 사례가 매우 드물지만 피해자는 성폭력을 신고했다가 역고소를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더욱 침묵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연대회의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성폭력 무고 고소 중 82.6%는 불기소 처분으로 종료되었으며 기소한 사건 중에서도 15.5%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연대회의가 전국 131개 성폭력 상담소 중 66개의 성폭력상담소의 2019년 1월부터 3월간 이뤄진 강간 상담사례를 분석한 결과, 총 1030명의 유사강간을 포함한 성폭력 피해사례 중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 없이 발생한 사례는 735건으로 71.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상습적인 위협이나 고립된 상황 등 '피해자가 벗어나기 어렵고 도움 받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는 사례'와 '피해자를 속이거나 피해자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력한 상태를 이용한 사례'로 나타났다.

최나은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법에서 말하는 폭행이나 협박이 없이도 성폭력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며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성적 자유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쉽게 제압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형법상 강간죄의 뿌리는 '정조에 관한 죄'...가부장적 인식 반영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장은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은 피해자의 동의 여부보다 여성의 '정조'의무가 더 중요했던 가부장적 인식에서 출발했다"며 "성폭력 피해자는 죽도록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몸가짐을 잘못해 성폭력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음행에 상습이 있어서', '보호할 가치가 없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을 당한다"고 말했다.

박 활동가는 "이제 우리사회는 성폭력을 '성적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죄'라고 한다"며 "'정조에 관한 죄'를 전제로 규정된 구시대적 법 체계를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성폭력은 여성의 정조에 관한 문제가 아닌 피해자의 인격권, 존엄성, 성과 재생산의 권리 등을 침해하는 문제"라며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판단하는 것이 세계적인 입법 추세이자 국제 사회의 권고"라고 덧붙였다.

대법원 판례(2019.6.13. 선고 2019도3314)에서도 "성적 자유는 적극적으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행위를 할 것인가 여부, 성행위를 할 때 상대방을 누구로 할 것인가 여부, 성행위의 방법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라고 판시한 바 있다.

강간죄 성립 요건을 '폭행,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전환해야

도경은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성폭력 피해자는 본인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저항했는지를 스스로 입증해야만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며 "이러한 엄격한 기준으로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던 다양한 맥락이 삭제된다"고 지적했다.

국제사회에서도 강간죄의 기준을 '동의 여부'로 판단하는 흐름이다. 유럽인권재판소와 같은 국제재판소들은 "국가는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모든 성적 행위를 기소하고 처벌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에서도 2018년 3월 우리 정부에 형법 제297조 강간죄를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영국, 스웨덴, 독일, 캐나다, 미국 등 여러 선진국들은 이러한 국제적 기준에 따라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또는 동의 없는 성적 침해를 강간죄 등으로 규정하여 폭행이나 협박이 없어도 처벌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동의가 있었다 해도 폭행이나 협박, 위계나 위력, 피해자의 연령, 장애유무, 무의식, 공포 등을 고려해 실질적인 동의가 불가능한 경우까지 '동의 없음'으로 판단해 처벌하는 입법을 채택하기도 했다. 나아가 스웨덴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의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까지도 처벌하도록 규정한 바 있다.

우리 국회에도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의사에 반하여' 또는 '동의 없이'로 변경하거나 비동의간음죄를 별도로 신설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9개의 형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황이다. 하지만 국회의 파행운영으로 법제사법위원회 제1소위원회에서도 아직 구체적인 논의조차 안 되고 있다.

김영순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법안이 1소위에 상정되면 위원장과의 공식면담 등 국회 압박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대회의가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참가자들은 '1953년 정조에 관한 죄', '1995년 강간과 추행의 죄', '폭행 또는 협박'이라고 쓰인 판넬을 부쉈다. ⓒ프레시안(조성은)


▲연대회의가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올해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를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한 '성적 침해의 죄'로 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프레시안(조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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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은 기자 p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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