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시민을 탈북민 대하듯? 통일 때려치우라 할 것"
[먼저 온 통일은 왜 남한을 떠났나] 영국에 거주하는 최승철 씨 上
"평양 시민을 탈북민 대하듯? 통일 때려치우라 할 것"

오는 19일은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1주년 되는 날이다. 1년 전, 5월1일경기장에 꽉 들어찬 평양 시민 앞에서 연설을 하던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되었다. 문 대통령은 '평화'와 '자주통일'을 언급했다. 평양 시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남과 북이 평화 통일에 대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잠시 주춤거리는 때도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이미 평화, 나아가 통일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 그런데 정말 통일이 되면 어떨까? 통일 한반도에서 남과 북의 시민들은 모두 행복할 수 있을까?

탈북민 출신 주승현 통일학 박사는 저서 <조난자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 실재하고 있는 탈북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 배제가 북한 주민들에게 전해질까 하는 우려다. 만약 이런 사실을 북한 주민들이 알게 된다면 한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남한이 주도하는 통일을 더욱 강력하게 거부할 것이며, 통일 그 자체에 대한 열망도 사그라들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것이 두렵다."

남한 정부가 통일을 말하는 사이, '먼저 온 통일'이라 불렸던 탈북민들은 '조난자'가 되어가고 있다. 편견과 차별, 배제에 견디다 못한 이들은 하나둘 떠나갔다. 사선을 가로질러 온 남한 땅을 다시 등지고 제3국으로 향한 것이다.

<프레시안>은 지난 7월 말, '북도 남도 아닌' 유럽으로 간 '조난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기존 미디어에 등장하는 탈북민과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북한이 아닌, 남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한 정부와 사회가 통일을 말하기 전에 탈북민에 대한 처우와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 2편에 걸쳐 먼저 소개할 이는 영국에 사는 최승철 씨다. 북한에서 의대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인 최 씨는 남한에서는 탈북민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사를 운영했고, 영국에선 탈북 주민 단체 '재영한민족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만큼 탈북민 사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는 지식인으로서 북한과 남한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풀어놓았다. 꼬박 이틀간 그가 쉼 없이 풀어놓았던 이야기를 갈무리해 전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평양 5월1일경기장을 방문한 모습.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영국으로. 그의 대담함은 애초 핏속에 녹아 흐르고 있었던 걸까.

"아버지가 중국 장춘에 있는 학교에 다니셨어요. 거기에 일본 학생, 중국 학생, 조선 학생이 있는데, 그때 조선 사람이 얼마나 '값'이 없었냐면, 조선 출신 선생이 일본 학생한테 인사를 해야 했대요. 그래서 조선 선생이 조선 학생을 앉혀놓고 얘기했더랍니다.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나라를 뺏긴 것이다. 수학 경연에서도 지면 안 된다.'

그 조선 선생이 북한으로 가서 초대 북한의 공업사에 계셨는데, 제자들한테 편지를 보냈대요. '나라에 기술자가 없다'고요. 그 편지 한 통에 아버지는 그길로 맨발 바람으로 집을 나가서 혼자 조선에 갔대요. 그니까 시쳇말로 '똘끼'가 좀 있었던 거죠."

최승철 씨는 그 '똘끼'가 본인에게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에요. 덕분에 생고생을 좀 했죠"라며 허허 웃었다.

지금은 웃을 수 있다. 영국이라는 낯선 땅에 정착한 지 10여 년. 이제 영국은 승철 씨에게 제2의 고향이 됐다. 돌고 돌아온 먼 길이었다. 영국에 오기까지는 마냥 웃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어디 한 군데 마음 둘 곳 없던 지난 세월은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나날들이었다.


▲최승철 씨. ⓒ프레시안(박정연)


"등굣길에 널린 시체...'인민'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머리가 좋았다. 전국에서 순위를 다투는 큰 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승철 씨 또한 전교에서 공부깨나 잘하기로 소문났다. 어려서부터 청진기와 가운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북에서 의사는 남한 못지않게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직업이었다.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던 그는 당연히 의사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절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전국에 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무력부(국방부)에 인력을 충원하라는 지시였다. 의대에 가려고 열심히 공부했던 승철 씨는 핵발전소 연구소에 갈 운명에 처했다.

없는 살림에 빼갈에 여과담배까지 마련해 군 동원부에 뇌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당의 방침은 엄연한 것이었다. 뇌물을 받은 담당자는 무력부 일에서 빼줄 수는 없다며, 대신 철도청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의사를 꿈꾸던 승철 씨는 철도 기관사가 되었다. 북한의 철도청은 군대와 비슷했다. 제복을 입었고, 무엇보다 입소 후 5년 동안은 대학 진학을 꿈꿀 수 없었다. 기관사에 대한 대우는 좋았지만, 대학에 가기까지 5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현실이 승철 씨에겐 끔찍히도 힘들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나서야 승철 씨는 그토록 바라던 의대에 입학했다. 하루 4시간 자면 많이 자는 것이었다. 조직학, 생리학, 해부학.... 승철 씨는 "지금 생각해도 혈압 오르는 과목들"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철도 위에 있을 때보다 행복했다고 했다. 의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힘들었지만 견딜 수 있었다.

의과 4학년이었던 1996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기숙사부터 대학병원까지 가는데 시체가 막 널려 있었어요. '구루마'라는 리어카 끄는 사람들이 길 가다가 시체를 발견하면 안타까우니 리어카에 실어다가 병원 앞에 가져다 놓은 거죠. 외과총론 강의실이 대학병원 정문 바로 앞에 있어서 그 강의 하는 날은 시체를 걷어야 했는데 그걸 하기 싫어서 일부러 지각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해부학 실습을 할 때 한 사람 앞에 한 구씩 그 시체들을 썼어요. 누군지도 모르고 해부했어요. 그때 한 100만 명은 죽지 않았을까 해요."

매일 아침 교문 앞에 쌓여가는 시체들을 보며, 북한 정권에 대한 반감이 움트기 시작했다. 북조선인민주의공화국은 인민이 우선이고 인민을 위해 운영된다고 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기근에 전염병까지 덮쳐 인민이 죽어나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죽는 건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정책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교과서를 펴면, 제일 먼저 '김일성 동지가 다음과 같이 교시했다'고 하면서 어록이 나와요. '전염병과 정신병은 사회가 만든 병'이라고요. 자본주의로 사람들이 병 든다는 주장을 하려고 한 말일 텐데, 저한테는 이게 거꾸로 들리는 거예요. 수령님 교시 말대로, 이 사회가 못돼먹었으니 전염병이 도는 것이라고요."

마음에 맞는 동무들과 만날 때면 반정부 데모라도 해야 한단 이야기를 공공연히 했다.

"지도자가 현지 시찰을 자주 오니까, 김정일 왔을 때 폭탄이라도 들고 가야 하지 않나, 아니면 삐라라도 뿌릴까. 그렇게 분노를 표출하고 정치 과목 시간에는 대놓고는 못 해도 에둘러서 정부 비판을 하고 그랬죠."

어느 날, 한 교수가 승철 씨를 불러냈다. '승철 학생, 무슨 말 하는지 알겠는데 조심하십시오.'

정부와 국가에 대한 회의감은 탈출 욕구로 이어졌다. 그래도 하던 공부는 마저 하고 떠나자는 생각에 졸업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프레시안(박정연)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가족들은 만류했다. 어머니는 눈물바람으로 매달렸다. 하지만 승철 씨의 생각은 굳건했다.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다. 여기는 큰 지옥이다'라며 간곡하게 어머니를 설득했다. 당시 연애 중이던 아내는 승철 씨의 뜻을 존중했다. 딱 한 달만 눈으로 보고 오겠다고 했다. 1999년 7월 27일 전승기념일의 밤, 공급술에 군대도 해이해진 틈을 타 두만강을 가로질렀다.

당초 아내에게 말했던 한 달은 석 달이 됐다. 그렇게 다시 돌아와 예닐곱 번 더 강을 건넜다. 승철 씨는 중국의 넓은 대륙에 마음을 뺏겼다. 그곳엔 북한처럼 답답한 규율도 없었고, 굶주림과 질병에 죽어 나가는 이들도 드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시골이었는데, 나한텐 파라다이스(천국) 같더라고요. 자유로우니까. 가족들이 입에도 담지 못할 욕을 했지만 당시에 저는 귀에 아무것도 안 들어오더라고요."

연길에는 승철 씨의 뒤를 봐주는 사촌들도 있었다. 아예 터를 잡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건축 일 하는 사촌 형이 힘이 좀 있었는데,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은 날이었어요. 형 졸병 노릇을 하던 조선족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를 극진히 대접했어요. 그러더니 한 놈이 '이번에 조선에서 돼지들을 잡아 왔는데 돼지들이 곱게 생겼어'고 하더라고요. 무슨 소린가 했는데, 여자들이 열댓 명 나오더라고요. 북한 여자들이었어요. 사각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잠깐 마주친 눈이 꼭 물에 빠진 것 같은 눈이었어요.

순간 술이 확 깨더라고요. 맥주병을 들이밀면서 '너 이 새끼, 조선 사람 맞냐. 어떻게 사람을 돈 주고 사고 파냐. 죽여버린다'고 호통을 쳤죠. 그랬더니 부하 놈 하나가 여자들을 가리키면서 '사촌 믿고 이렇게 설쳐대는 모양인데, 네가 저 간나들이랑 다를 게 뭐냐' 이러더라고요. 술도 진탕 마셨겠다, 열이 받아서 살인이라도 할 기세로 달려들었죠. 그러다가 피떡이 되도록 된통 얻어맞았어요.

그때가 엄청 추운 겨울이었어요. 그렇게 맞고 추운 길을 걸어가는데, 북한에 이런 말이 있거든요.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 그 말이 딱 떠오르는 거예요. 사촌 형 믿고 뭐라도 되는 양 으스대고 다녔는데 그 처지가 딱 그 꼴이더라고요."

그즈음, 북한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도 승철 씨의 자존심을 툭툭 건들었다. 여기서 아무리 잘 나가봐야 '조선 사람'이라며, 한국에 같이 가자고 설득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2002년 5월 한국행을 택했다.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2003년 1월 드디어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프레시안(박정연)


"남한도 '내 나라'가 아니었다"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조사 40일, 하나원 생활 60일, 도합 100일 만에 한국 사회에 발을 디뎠다. 다른 탈북민들보다 적응이 빨랐다. 여행사, 대북투자컨설팅, 외환컨설팅 같은 사업을 벌였다. 의사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통일부 사람들도 왜 의사 안 하냐고 막 뭐라 하대요. 근데 난 안 한다고 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남한에서는 진료를 보는 게 아주 대충이에요. 의사가 환자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아픈 게 낫기도 해요. 특히 부인 질병은 그래요. 환자 배려해주는 게 의사 일 잘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남한에선 환자 보는 시간이 1분을 안 넘기잖아요. 그건 의사 아니라고 봐요. 의료 비즈니스죠."

정착 2년 만인 2005년에는 탈북민 신문 '새동네'를 창간하기도 했다. 돈벌이 목적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탈북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하는 취지였다.

"그 시절만 해도 북한에서 온 엘리트가 손에 꼽았어요. 대다수 탈북민이 하나원 나오자마자 다단계를 당해요. 집에 정수기, 김치냉장고 없는 탈북민이 없을 정도예요. 그리고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하면서 보험을 월 100만 원씩 들어요. 왜 그런 걸 당하겠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인터넷이 활성화가 많이 안 됐으니까, 사람들이 남한 물정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선배 (탈북민)들이 후배들한테 해 먹고, 저들끼리도 그렇게 사기를 쳐요. 계속 똑같은 사기를 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탈북민들에게 자본주의를 배우게 하려는 취지에서 신문을 생각해낸 거죠."

다행히 어느 정도 정부 도움을 받았다. 하나원과 고용지원센터에 신문을 배포했고, 하나원을 통해 취합한 주소를 토대로 탈북 가정 가가호호에 보급했다. 한 번 발행할 때면 4000부를 찍었다. 정보지에 가까웠지만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었다. 통일부나 국정원에서도 승철 씨를 찾았다.

"전국적으로 탈북민 네트워크가 없어요. 아마 지금까지도 제가 구축했던 그런 네트워크를 못 따라올 겁니다. 그러니 통일부 정책기관도 그렇고 연구하는 데도 그렇고 국정원도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누가 달아났다고 하면 바로 통신원한테서 전화가 왔을 정도였으니까요."

내용은 북한이나 남한 사회에 대한 논평이 아닌 정보 제공 중심으로 꾸몄다.

"정치 이야기를 하자면 '김정일 타도'부터 외치는 게 탈북민 사회니까요. 그래서 저는 정치 기사는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두어 번은 지성인으로서 북한이탈주민 후원단체 비판 기사를 싣기도 했어요. 이 단체 대표가 4선 한나라당 의원이었는데 탈북민들을 가르치려 들고 갑질하는 아주 건방진 사람이었거든요. 그리고 후원회에 비리가 많았어요. 정착 도와준다고 후원받은 돈을 사적으로 쓰고 그래서 기획 취재를 했죠. 그랬더니 탈북민들 사이에서 호응이 생기더라고요. '우리를 대변하는 미디어'라는 인식이 생긴 거죠."

'살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신문사도 그럭저럭 잘 운영하고 있었고, 몇 안 되는 지식인 출신 탈북민이라 국정원이나 통일부 토론회에도 종종 불려 나갔다. 처음 한국에서 정착할 생각으로 북을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뜻밖에도 남한에 와서 잘 적응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북에서 데려온 아내와 아이를 낳아 가정도 착실히 꾸려가고 있었다.

"기초생활수급비도 1년만 받고 안 받겠다고 했어요. 이 돈이 어려운 사람에게 주려는 돈인데 사지 멀쩡하고 정신 멀쩡한 제가 받는 게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터졌다. 신문사 앞으로 나온 정부 지원 고용지원금을 탈북민 직원 다섯 명에게 월급처럼 제공한 게 검찰에 발각된 것이었다. 승철 씨는 즉각 구속됐다.

"구속까지 될 일인지는 몰랐어요. 제가 돈을 갈취한 것도 아니고 남을 도와주려다가 법에 저촉한 것인데…."

판사는 구속 사유로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탈북민처럼 달아날 데가 없는 사람이 또 어딨습니까. 그런데도 '도주의 우려가 있다'니요."

누구도 그에게 돈을 주면 구속을 면할 수 있는 보석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40일이 넘게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영등포구치소에서 설을 맞았거든요. 너무 억울해서 화장실에서 펑펑 울었어요. 몇천억 원씩 주가 조작하는 그런 엄청난 경제 사범들이 오는 방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너는 남 도와준 건데 국가에서 표창을 줘야지, 왜 감옥에 왔냐'고요."

2000만 원 넘는 추징금을 내고 간신히 풀려나왔을 때 이미 회사는 풍비박산이 난 채였다.

"너무 서운하더라고요. 모든 게 원망스러웠어요. 그 때 심정으론 정말 한강 물에 뛰어들고 싶었습니다. 내가 남한 사람이라면 이런 고초를 겪지 않았을 텐데.... 구속을 당하고 보니 결국 여긴 '내 나라'가 아니구나, 하고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의식적으로 지웠던 차별의 기억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대전 인근에 사는 사촌 누이네 농사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사촌 매형이 빈정대듯이 그러더라고요. '북한에서 의사 면허 있었다며? 북한에서는 중학교만 나오면 의사 되나?'

사실 이런 이야기 들은 건 무수히 많죠. 그런데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똑똑한 사람들은 그런 이야길 안 해요. 그래서 별 신경 안 쓰고 살았는데, 구속되고 새삼 깨달은 거죠. 나의 가치가 증명된 거니까. '역시 한국인 범주에 못 들어가는구나', '주민등록증 나왔다고 한국인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겠다'고요."

ⓒ프레시안(박정연)


"탈북민들은 체제 경쟁의 승전물"


한국은 승철 씨에게는 중국이나 다를 바가 없는 '남의 나라'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전부터 승철 씨에게 '미국 가자'며 부추기던 탈북민 친구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전화하니, 친구는 영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봐라, 내가 뭐랬냐. 거긴 우리가 살 데가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한국에서 살면 넌 죽을 때까지 탈북자다. 여긴 인종 상관없다. 여기서는 North Korea든 South Korea든 상관없다.'"

'North Korea든 'South Korea'든 상관없다.' 이 이야기에 승철 씨는 눈이 번쩍 떠졌다. 다시 한번 아내를 설득했다.

북을 떠나 남한으로 왔던 승철 씨는 2008년 다시 남한을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난민'이 되어 도착한 영국은 철저히 '남의 나라'였다. 이곳 사람들과는 언어도, 생김새도 달랐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이 편했다.

"한국 정부는 탈북하면 일단 돈을 줘요. 그 배경에 정치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잖아요. 정부에서 주는 돈 받고 '북한 좋다'는 말을 하면 배은망덕한 일이 되는 것이거든요. 한마디로 탈북민들은 남한에서 체제 경쟁의 승전물이고, 북한과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증거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승철 씨는 탈북민 정책 또한 정치적 취지에 매몰돼있다고 지적했다.

"하나원에서는 '새 조국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조국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 할아버지 누워있는 곳이 조국인데, 남한 사회는 탈북민을 억지로 바꾸려고 노력해요. 정작 대한민국 사람 같은 대우는 안 해줄 거면서 그런 달콤한 소리만 하니 웃기는 일이지요.

합동신문도 없애야 합니다. 서독은 통일 전에 동독 사람들이 오면 하나원 같은 교육 없이 조사도 중앙합동신문센터처럼 구속 없이 3~4일 만에 조사하고 끝냈어요. 그런데 한국은 간첩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합동신문을 한다고 하잖아요. 맞는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는 간첩 1명 잡자고 100명을 괴롭히는 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닙니까.

지금 평양 시민 200만 명 붙잡고, 통일 돼서 지금 탈북민들 대하듯이 한다고 해봐요. '재수 없다'고 통일 안 한다고 때려치우라고 할 겁니다. 북한 인권 이야기하기 전에 탈북민 인권부터 이야기해야지요."(다음에 계속)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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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기자 naeor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박정연 기자 daramj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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