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난민'이라서 안 된다?
'가짜 난민'이라서 안 된다?
[인권으로 읽는 세상] 70년의 무게로,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가짜 난민'이라서 안 된다?
70년. 시간이 의미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의미를 들여다보게 하는 때가 있다. 올해가 그랬다. 70년 전 4월 3일, 제주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봉기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한반도에는 두 개의 헌법,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다. 그해 12월 1일, 여러 면에서 진보적이라고 평가되는 제헌헌법이 무색하게 남한에서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열흘 뒤 유엔총회는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했다.

70년이 흐른 지금 판문점선언과 북미정상회담은 분단체제의 해소를 손에 닿는 목표로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주4.3은 이름을 얻지 못하고, 14년 전 호기롭게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쳤던 정치세력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개헌을 하자는데 성평등은 안 되고 양성평등이어야 한다고, 사람은 안 되고 국민이어야 한다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70년의 시간에 인권의 무게는 어떻게 실린 것일지 묻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가짜라서 안 된다?

올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이슈 중 하나는 '예멘 난민'이었다. 예멘인 수백 명이 제주에 왔다는 소식은 '가짜 난민'이 몰려오고 있다는 진단과 함께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불법취업을 목적으로 들어오는", "무사증을 악용한", "여성 안전을 위협하는" 등의 수식어들이 난민을 설명하는 말이 되었다.

난민인권을 오래 다뤄온 단체들로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난민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려야 했다. 3년 전 터키 해안에서 발견된 세 살 시리아 어린이 크루디의 사진이 사람들 마음을 울렸을 때에도 난민은 한국사회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난민들의 안타까운 현실에 공감을 표하고 안타까워했다.

난민이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쟁과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난민의 처지를 호소하는 말들은 오히려 미끄러졌다. 난민 인정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등 제도를 개악하려는 움직임이 드세게 일어났다. 그런데 소위 '난민 반대 세력'은 난민을 통째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난민을 받지 말자는 게 아니라 '가짜 난민'을 가려내자는 것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다. '진짜라면 권리를 보장해야겠지만 가짜이므로 권리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유사한 구도가 여러 사안에서 반복된다. 동성애혐오세력은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님을 강변하며 동성애를 도덕과 문화의 문제로 규정하려 든다. 동성애는 '가짜' 정체성이라는 주장이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태도도 유사하다. '성폭력은 문제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가 '진짜' 피해자라는 게 증명될 때에만 성폭력 사건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올해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드디어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법원은 "진실한 양심"을 따지며 '가짜' 양심을 가려내려고 한다. '생물학적 여성'에 대한 강조 역시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또 다른 판본이다.

대립의 언어가 된 인권

진짜와 가짜를 가르려는 동기를 인권 의식의 부족으로만 탓하기에는 단순하지 않다. 난민을 반대한다는 사람이 어떤 이주민이 겪는 차별 이야기에는 공감하고, 성소수자를 배격하는 사람이 여성이 겪는 부당한 현실에는 크게 분노한다. 게다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에 권리의 언어를 끌어다 쓴다.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라며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안전할 권리를 위해서 난민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미투(me too)에 대항한다는 '힘투(him too)'는 미투가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남성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권리로 권리를 부정한다.

인권이 주로 부딪치는 문제는 국가나 자본이 인권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새롭게 등장하는 문제는 인권이 대립의 언어로 차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의 권력관계와 맥락을 삭제한 권리의 언어가 인권의 토대를 흔들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집단 간 적대가 두드러지고 있다. 남성 대 여성, 국민 대 난민, 이성애자 대 동성애자, 청년 대 노인…. 전세계적으로 번지는 극우 포퓰리즘과 다르지 않은 양상이다.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할 집단을 지목하고 배제되어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가짜뉴스'가 혐오를 묶어세우는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치인들도 나서서 거든다. 상대 집단의 권리가 부정되어야만 자신이 속한 집단의 권리가 보장되는 것처럼 선동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권이 아니라 갈등이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인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막중한 정부와 국회, 언론 등의 행위주체는 대립 구도를 그대로 승인한다. '가짜 난민'을 가려내겠다고 맞장구치거나, 찬성 반대 의견을 모두 들어야 한다며 기계적 중립을 내세운다. 여혐도 남혐도 문제라는 양비론 뒤로 숨기도 한다. 세계인권선언 마지막 조항인 제30조의, 권리를 파괴할 권리는 없다는 당부는 잊혔다. 존재를 부정하는 말과 행동이 공공연히 용인되고 심지어 '경청'되기도 하는 사태야말로 지금 인권이 처한 난국이다.

무너진 사회

70년 전 58개 국가가 약속한 인권은 이제 어느 나라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는 정도가 되었다. 한국사회에서도 인권의 관점이 꽤 많은 의제의 쟁점을 구성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나로서' 살아갈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심지어 증오와 적대 앞에 내던져져 있다. 노동자의 권리에 진전이 있는 듯 보여도 경제적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는 듯 보여도 정치적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고, 사회에 아무런 기대 없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사회에 기대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를 공통분모로 서로 기대기 시작했다. 집단 내 결속은 강해지지만 사회는 균열된다. 정치공동체로서의 국가 자체가 의문시된다.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다소 더디더라도 갈등하면서 삶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단위와 준거집단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분할되고 대립하는 권리의 언어들은 균열된 정치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갈라진 집단들은 끌어내리기 경쟁을 한다. 그러나 누구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만큼 비정규직 일자리가 유지될 때, 일도 구하기 어렵고 일해도 먹고살기 어려운 사정이 나아질 수 없다. '진짜'는 보호하고 '가짜'는 내버리는 권력이 존재하는 한, '가짜'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위치를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타인의 권리를 끌어내리는 만큼 자신의 권리도 반납하게 되는 악순환이다.

이것은 인권의 문제 이전에 사회와 정치의 문제다. 그러나, 그래서 인권의 문제다. 인권은 약속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며 자유롭고 평등하다." 이것을 인정할 때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점을 기억하자며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했다. 약속을 지키려면 인권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긴요하므로 권리의 목록을 제시했다. 이제 권리의 목록쯤은 누구에게나 익숙해졌지만 인권을 약속하는 사회가 사라져버렸다. 인권의 선순환을 만들어가는 정치가 사라져버렸다. 70년의 무게로 직면해야 할 현실이다.

70년의 무게로

이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이던 시절 인권의 후퇴는 누가 봐도 명백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제자리로 돌려놓거나 적폐를 치우고 가던 길 계속 가는 것이 인권의 길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인권을 둘러싼 현실은 되돌아가거나 멈췄던 것이 아니다. 달라졌다. 여전히 정치를 보수세력과 개혁세력의 경쟁으로 보니, 여당 대표의 입에서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비례대표제를 못하겠다는 말도 나온다. 다시 정권을 잡아야 하니 차별금지법이나 국가보안법처럼 '민감한 사안'은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혐오의 정치가 사회를 장악해 정치도 사회도 사라지는데 자신들의 손익 계산만 하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8조는 우리에게 인권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제29조는 그런 공동체에 대해 우리가 서로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를 가진다고 말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대한민국'만 남고 '사회'는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로, 인권이 실현될 수 있는 체제를 구성해야 한다.

박근혜 탄핵 촛불 이후 87년 체제를 넘어 새로운 사회를 여는 과제가 놓여있다는 이야기를 많은 이들이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분단과 미완의 해방을 숙제로 남긴 70년의 무게로 새로운 사회에 도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해방은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었다. 신분제로부터, 빈곤으로부터,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로운, 평등한 사회에서 존엄한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꿈이었다. 70년이 흐른 지금 해방의 꿈을 되새겨야 한다. 촛불의 기대와 낙관, 현실의 지체와 비관 사이에서 인권을 다시 기억해내야 한다.

사회가 무너진 시대 다시 사회를 세워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토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70년 전 세계인권선언이 천명한 인간의 존엄은 여전히 사회를 다시 세울 땅이다. 인간의 존엄에 기초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상상하며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인권을 약속할 정치공동체는 근대 국민국가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기업으로부터 허락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기업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도 상상해야 한다.

다시,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처벌이 위헌이라는 결정은 오래 기다려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후 대체복무제 도입 논의는 원점 회귀와 다를 바 없었다. 국방부가 내놓은 안에는 병역기피를 막겠다는 목표밖에 없었다. 양심을 묵살하던 시대에서 '진실한 양심'을 판별하는 시대로 진입했을 뿐이다. 인권은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어떤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지는 사회의 여러 조건을 고려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선 인정해야 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권'으로 인정할 때 우리는 평화를 위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병역의무를 이행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분배하는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받아들일수록 평화로운 세상이 가까워진다. '인권'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질문이다.

인권은 끊임없이 그리로 가게끔 하는 힘이다. 인권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당장 방법이 보이지 않더라도 세계인권선언을 기억하자. 굶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성적 지향을 부정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다르다고 손가락질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며, 자유롭고 평등하다. 그리고 우리는 인권이 온전히 실현되는 세상을 약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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