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적 대법원장제, 이대로 둘 건가
제왕적 대법원장제, 이대로 둘 건가
['촛불개헌' 관점에서 본 정부 개헌안·<9>]
제왕적 대법원장제, 이대로 둘 건가

['촛불개헌' 관점에서 본 정부 개헌안·<1>] "대통령 개헌안, 일단 합격"...다음은?

['촛불개헌' 관점에서 본 정부 개헌안·<2>] 국무총리 제도의 딜레마


나는 지금까지 8편의 연재 글을 통해서 한국의 대통령이 어째서 제왕적 대통령인지, 한국의 국회의원이 어째서 제왕적 국회의원인지를 설명했다. 대통령 개헌안이 어떤 면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탈제왕화에 실패했으며 왜 그렇게 됐는지 따져봤다. 동시에 국가권력을 틀어쥔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국회의원을 몰아낼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며 이번 개헌과정에서 본격적 공론화를 기대했다. 이제 제왕적 대법원장을 다룰 차례다. 두 편으로 나눠서 알아본다. 한국의 대법원장은 어떤 면에서 제왕적 대법원장이며 어떻게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가 지금까지 유지돼 왔는지를 밝히는 게 첫 번째 글이다. 두 번째 글에서는 제왕적 대법원장제를 혁파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방안을 제시하며 그 관점에서 대통령 개헌안의 사법부 관련 사항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제왕성의 근원은 법관인사권 독점이다

다소 과장하자면 우리나라사법부는 제왕적 대법원장아래 3000명의 난쟁이 법관들이 땅 밑에서 일하는 1만3000 명 법원공무원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이는 대법원장의 제국으로 비유될 수 있다. 이런 설명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장이 최고법원의 재판장으로서 법의 제국의 대제사장일 뿐 아니라 사법부 전체의 행정수반으로서 사법행정과 법관인사의 총책임자를 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대법원장의 제왕적 지위는 그가 법원행정처의 보좌를 받아 법관인사권과 법원공무원인사권, 사법행정권을 독점 행사하는 사법부의 행정수반이라는 지위에서 온다.

대법원장의 제왕성을 쉽게 이해하려면 국회의장과 비교해보면 된다. 따지고 보면 국회의장도 국회를 대외적으로 대표하고 본회의 주재권한을 가진 국회'의장'일 뿐 아니라 사무처, 입법조사처, 도서관 등을 거느린 입법부의 행정수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장을 제왕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법관 3100명 전체에 대해 전보, 승진, 징계 등 전적인 인사권을 행사하는 대법원장과 달리 국회의장은 국회의원 300명에 대해 아무런 인사권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법원장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300명을 마음대로 상임위에 배치, 교체하고 마음대로 상임위원장을 시켜주며 마음대로 국회부의장을 시켜줄 권한을 가진 제왕적 국회의장을 떠올리면 된다. 현실세계에는 이런 권한을 가진 제왕적 국회의장은 없는 반면 전국의 법관을 상대로 이런 권한을 휘두르는 제왕적 대법원장은 있다. 이게 우리 사법부의 근본문제이자 이번 개헌기회에 반드시 해소해야 할 근본과제 중 하나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제왕적 대법원장으로 완성된다

제왕적 대법원장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중요한 기둥이자 제왕적 대통령의 하위파트너다. 제왕적 대통령은 제왕적 대법원장이 협력하지 않으면 지속가능하지 않다. 모든 제왕은 적법절차를 무시하게 마련이라 그의 권력남용은 정치스캔들의 옷을 입고 언젠가 사법심사의 도마 위에 오른다. 이때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용감한 법관이 있으면 제왕적 대통령도 그때그때 필요한 법의 응징을 받는다. 실은 이렇게 되면 이미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다. 법원의 살아있는 견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뽑은 제왕적 대법원장이 법관의 돌출행동을 적절히 제어해줘야만 정권이 휘청거릴 만큼 결정적으로 불리한 '악성'판결을 예방할 수 있다.

제왕적 대법원장은 승진, 전보 등 인사권을 무기로 용기 있는 소신법관의 출현과 도전을 억누른다. 아무리 정의로운 법관이라도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한직을 전전하다 옷 벗고 나갈 위험이 작지 않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끝까지 남아서 법원장을 하고 대법관을 하는 출세법관들이 대부분 교양 있고 매너 좋은 권위순종형 인간들이다. 제왕적 대법원장의 의중이 제왕적 대통령 편이라는 게 읽힐 때 이들은 기꺼이 제왕적 대법원장의 뜻을 따른다. 제왕적 대통령은 제왕적 대법원장을 통해서만 사법부 전체를 자신의 비옥한 영토로 삼을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반드시 제왕적 대법원장을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다.

사법부 독립이 법관 독립은 아니다

사법부의 독립이 필요한 이유는 국가권력의 남용을 통제하고 국민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법부가 입법부나 행정부의 간섭아래 놓인다면 무슨 수로 제대로 입법부와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겠는가. 행정부와 입법부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사법부 독립의 실체는 사법(재판)의 독립이고 재판의 독립은 그 주체인 법관의 독립에 다름 아니다. 만약 사법부 소속 법관들이 여전히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며 재판에 임한다면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서 사법부 독립은 법관독립을 위한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제왕적 대법원장은 법관독립의 암적 존재다. 제왕적 대법원장시스템에서는 어떤 법관이라도 대법원장의 요직발탁과 승진, 대법관제청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자연스레 세상의 이목과 대법원의 관심을 끌만한 재판에서 대법원장의 의중을 살피게 된다. 한마디로 제왕적 대법원장은 존재 그 자체로 법관들이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의식하며 중요사건을 재판하게 만든다. 법관독립과 상극인 것이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간섭에서 사법부의 독립을 확보했어도 사법부를 대법원장의 제국으로 만든 대가는 혹독하다.

강한 대법원장이 아니라 강한 법관이 강한 사법부를 만든다

제왕적 대법원장이 있으면 강한 사법부가 되지 못한다. 우선 기개 있고 소신 있는 법관을 길러내지 못하고 소속법원장의 인사고과와 대법원장의 정기인사를 의식하며 움츠려든 용졸한 법관들을 양산한다. 강한 사법부는 개별법관이 강한 사법부지 대법원장이 강한 사법부가 아니다. 제왕적 대법원장제는 법관독립뿐 아니라 강한 사법부를 가로막는 잘못된 시스템이다.

강한 사법부도 법관독립이 강한 사법부를 의미한다. 권력남용과 인권침해를 법의 칼로 응징하며 약자의 최후 보루로 기능하는 강한 사법부는 법관이 권력의 유혹과 압력은 물론 여론과 통념에서도 독립하여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재판할 때만 가능하다. 물론 외부간섭과 윗분 눈치에서 해방된 법관도 적절한 통제를 받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제왕적 법관으로 타락할 수 있다. 법관독립의 강화가 다른 한편에선 법관의 권력남용 제어장치 강화로 귀결되어야 할 이유다.

제왕적 대법원장은 헌법이 만들어냈다

사법권을 행사할 사법부를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지는 헌법의 중요한 관심사이자 규율대상이다. 우리나라헌법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는 사법부(헌재 포함)에 대한 규정이 매우 간략하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헌법이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과 법관인사권 독점을 당연시한 데서 비롯된다. 우리 헌법은 지금까지 사법행정권과 법관인사권의 귀속주체를 명시한 적이 없다. 우리 헌법상 대법원장의 권한으로 규정된 건 대법관제청권이 전부다. 나는 헌법학자들이 이 조항에서 법관인사권의 대법원장 귀속을 읽어냈을 것으로 추정한다. 헌법이 대법원장에게 대법관인선권을 주었다면 그 아래 법관들에 대해서도 인사권을 주었다고 해석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은 사법행정권, 특히, 법관인사권의 대법원장 집중과 독점이 가져올 법관독립에 대한 악영향을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선진국헌법의 예에 따라 대법원장 대신 제3기구(이를테면 최고사법평의회)를 만들어서 법관인사권과 사법행정권을 맡겼을 것이다. 설령 대법원장에게 법관인사권을 맡겼더라도 권한 행사의 절차요건을 규정하는 등 효과적인 견제장치를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사회의 헌법학의 한계가 여론주도층의 헌법인식의 한계가 되고 그것이 다시 헌법규율의 실패로 전환된 전형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국회와 청와대는 왜 제왕적 대법원장을 방치했나?

헌법에는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을 견제할 장치가 전혀 없지만 법원조직법에는 대법원장의 인사권전횡을 막을 수 있는 장치가 여럿 있는 게 사실이다. 대법관회의, 법관인사위원회, 대법관제청절차, 법관징계위원회, 법원별 판사회의 등이 그것이다. 대체로 사법파동을 거칠 때마다 신설되고 강화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법과 실무에서 모두 최대한 물 타기가 진행돼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 수준으로 운영된다. 제왕적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는 각종 통제기구와 절차가 형식적으로 굴러가도록 온 힘을 쏟는 반면 법원행정처가 위원으로 위촉하는 내외부의 인사들이나 국회의원, 법학자들은 법의 취지나 운영실태에 관심을 두거나 개선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법원조직법의 절차통제가 유명무실해진 이유다.

우리법원과 사회는 이미 헌법과 법률, 관행과 의식으로 수십 년 동안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수용한 상태였다. 이따금 법관들의 사법파동으로 실밥이 뜯어져나갔지만 옷의 원형이 바뀌지 않은, 몸에 잘 맞는 옷으로 여겼다.


매년 어김없이 몇백 명씩의 법관이 전근 발령을 받아 보따리를 쌌지만 이런 전보인사 관행을 법관독립의 관점에서 시비 거는 사람은 법원 내외에 전무했다.

이론적으로는 법원조직법을 개정해서 제왕적 대법원장을 실효성 있게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과 법관인사권이 헌법으로 뒷받침되기 때문에 법원조직법으로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법원조직법을 손볼 때도 대법원장의심복, 법원행정처의 엘리트판사들이 국회와 협의를 진행한다. 이들이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축소나 통제에 나설 리는 만무하다.

청와대와 여당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제왕적 대법원장을 지원하게 마련이다. 권력실세나 여당의원, 정권적 이해관계가 걸린 재판에서 필요한 정보를 가지려면 법원행정처의 엘리트판사들과 일정한 소통 고리를 잡고 있는 게 유용하다. 국회의원들은 대통령과 행정부의 일로도 정신이 없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법부까지 건드려서 법원행정처 판사들에게 찍히고 싶지 않다. 국회법사위원들은 주로 검찰출신이라 제왕적 대법원장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제왕과 측근에게 접근권이 있는 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제왕적 대법원장제가 편하고 좋다.

청와대가 사법발전위나 사법개혁위를 만들어서 사법개혁을 추진했지만 그때도 제왕적 대법원장제, 즉,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과 법관인사권 독점은 개혁의 도마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 사법발전이든 사법개혁이든 그 추진주체는 법원과 법관이라 누구라도 그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때 법원과 법관의 대표기구는 당연히 제왕적 대법원장의 최대수혜자들이 모인 법원행정처다. 실은 청와대건 국회건 사법부독립의 명분 때문에 사법부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문제제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여기다 바깥사람들은 잘 알기도 어려운 게 사법부조직이다. 제왕적 대법원장제가 오랫동안 무풍지대에서 순항해온 이유 중 하나다.

법학자와 법관들은 뭐 했나?

제왕적 대법원장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연구한 헌법학자는 몇 되지 않는다. 헌법학계에서는 사법행정제도에 대한 비교헌법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입법부, 행정부와 더불어 3부 국가권력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인신구속과 강제집행 등 가장 직접적으로 강제력을 행사하는 국가권력인데도 사법부의 구성과 조직, 통제에 대한 헌법전문가가 거의 없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입만 열면 사법부를 인권과 정의를 지켜내는 최후보루라고 치켜세우지만 막상 정의롭고 강한 사법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조사연구는 턱없이 부족했다. 법학자들도 제왕적 대법원장제의 확대재생산을 방임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직접당사자인 법관들도 오랫동안 제왕적 대법원장제의 문제점에 대해 제대로 눈뜨지 못하고 대안을 알지 못했다. 일제시대 때부터 내려온 제왕적 사법행정체계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받아들였다. 오히려 사법부가 비교적 예측가능성이 높은 능력주의 인사시스템을 발전시켰다고 자부하며 흔쾌히 수용한 측면도 없지 않다. 물론 이렇게 된 건 법관들이 공부한 표준적 헌법교과서들이 비교제도연구를 통해 우리 사법부의 제왕적 성격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어주지 못하고 보다 민주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우리법연구회, 깨어있는 법관들의 첫 조직된 힘

물론 제왕적시스템의 문제점을 온몸으로 느끼는 일군의 젊은 판사들이 간간이 사법파동을 일으켰다. 특히 1988년 사법파동의 여파로 우리법연구회가 1989년에 결성된 점은 특기할만하다. 우리법연구회판사들은 그 후 사법개혁의 내부추동력으로 자리를 지켰다. 우리법연구회는 1990년대 중반부터 외국의 사법행정제도와 법관인사제도를 틈틈이 공부하며 우리나라의 제왕적 대법원장제도가 사법독립의 진정한 적이라는 사실에 눈떴다. 일부 판사들이 새로운 지식의 세례를 받았으나 그것만으로 변화를 꿈꾸기에는 세력이 작았다. 구조는 강했고 변화는 더뎠다.

몇 해 전부터 법원국제인권법연구회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더욱 본격적으로 법관인사와 사법행정에 대한 비교연구조사활동에 박차를 가해서 유엔이 펴낸 사법제도와 인권보장 책자를 번역, 발간했다. 여세를 몰아 법관독립과 인세제도에 대한 법관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연대로스쿨과 공동으로 법관인사제도와 법관독립에 관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새로운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 법원행정처는 연구회 주도 세력과 심포지엄주제를 모두 제왕적 대법원장제에 대한 체제 위험 요소로 규정하고 심포지엄의 연기와 축소를 종용했다. 그 와중에서 결국 판사 블랙리스트 스캔들이 터져서 전국법관대표자회의까지 만들어낸다.

판사 블랙리스트에서 김명수 대법원장까지 전대미문의 드라마

제왕적 대법원장제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을 겪으면서 곪을 대로 곪아 터져 드디어 세상에 그 흉측한 몰골을 드러냈다. 법원행정처 고위간부들의 부당한 유혹과 압력을 이겨내고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제기한 정의로운 판사가 있었다. 전국의 판사들이 공분을 느껴서 함께 들고일어났다.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도 남은 임기를 채우기 위해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소집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인사제도 개혁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적 규모의 법관 집단저항은 제왕적 대법원장의 높은 담을 무너뜨리고 제왕적 대법원장제에 안티테제를 내걸은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출신이 대법원장을 맡는 일대 이변까지 연출한다.

제왕적 대법원장시대를 끝장내고 법관독립시대를 여는 첫 대법원장이 되겠다고 선언한 김명수 대법원장 시대의 개막도 실은 촛불시민혁명 덕분에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11개월 단축된 바람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래는 박 대통령이 양승태 대법원장 후임을 2017년 9월 중으로 인선할 터였다. 또한 더 이상 특권과 반칙, 갑질은 안 된다고 촛불시민들이 그토록 외쳐댔어도 법원행정처 고위법관들이 촛불혁명의 한가운데서도(2017년 1월과 2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습관적으로 회유와 협박 등 갑질을 일삼은 덕분이다. 법원행정처 판사들은 그만큼 제왕적 대법원장제에 중독된 채, 그만큼 민심과 동떨어진 채, 살았다.

요컨대, 제왕적 대법원장제 혁파의 시대적 소임을 받고 출범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는 촛불시민혁명과 국제인권법연구회,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과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바깥세상은 너무 모르고 내부법관들은 너무 익숙해져서 오랫동안 유지돼온 제왕적 대법원장제라는 희대의 괴물을 우리사회가 다잡을 수 있는 첫 번째 역사적 기회는 이렇게 왔다. 결국 직접당사자인 법관들이 불의한 상황을 뚫고 동료들과 조직하고 연대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능성이 열렸다. 누구도 직접피해당사자들이 가만있는데 대신해줄 수는 없다. 그것도 피해당사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느 사회에서나 최고의 엘리트로 인정받는 판사들 아닌가. 고도의 실력과 신분보장을 겸비한 판사 사회마저 자기분야의 고질적 구조를 자율적으로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리사회의 어떤 집단에게 자율해결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제왕적 대법원장제, 개혁 무풍 지대에서 개헌 핵심 과제로!

제왕적 대법원장제는 지난 수십 년간 휘몰아친 5년 주기 청와대발 개혁의 소용돌이에서도 개혁의 무풍지대로 남았다. 가끔 사법파동이라는 이름으로 개혁성향 법관들이 대법원장의 정권유착이나 인사전횡을 규탄하며 집단행동에 돌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제왕적 대법원장제의 일부 드러난 현상과 싸웠을 뿐 제왕적 대법원장제의 본질, 제왕적 인사권과 그것이 강고한 구조를 바꿀 수 없었다. 법관운동의 고유한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헌사항이라는 속성도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헌법사항은 아무 때나 바꾸지 못한다. 지난 30년 간 단 한 차례의 개헌기회도 열리지 않았다. 개헌론이 일어도 제왕적 대통령제에만 집중되었을 뿐 제왕적 대법원장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르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조사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어서 그 전모가 어지간히 드러날 날도 멀지 않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인사권이 어떻게 남용됐는지 더 생생한 증거가 나오면 법관인사권과 사법행정권의 귀속주체를 대법원장에서 제3기관으로 옮기자는 다양한 개헌제안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마침 30년만의 개헌정국 아닌가. 지난 수십 년간 학문적, 실천적 문제의식의 사각지대 속에서 순항을 거듭해온 제왕적 대법원장제가 드디어 역사의 박물관으로 들어갈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내외부 개혁여건은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내가 이렇게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제왕적 대법원장과 민주적으로 소통하고 제안할 수 있는 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제도화돼 활동 중이다. 이미 일반법관들이 개혁열차에 올라탔다는 게 중요하다. 


둘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제왕제 극복과 법관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김명수 대법원장의 시대가 열렸다. 


이것만으로도 더 좋을 수 없는데 하나가 더 있다. 본격적인 개헌정국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현재 대법원장에게 있는 사법행정권과 법관인사권(대법관제청권 포함)의 귀속주체를 개헌으로 바꿀 수 있는 30년만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물론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사법개혁의지가 높은 문재인 대통령의 존재도 아주 좋은 조건의 하나다. 제왕적 대법원장제 혁파를 위한 내외부의 환경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지금은 모든 법관의 굴신을 강요하는 제왕적 대법원장의 사법부를 모든 법관의 독립 위에 굳건히 서있는 국민의 사법부로 전환할 절호의 시기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이듯이 결국 깨어있는 법관들의 조직된 힘이 사법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였다.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법관들과 창립 멤버들에게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대법원장의 1인 왕국으로 타락한 제왕적 사법부를 혁파할 역사적 기회가 위대한 촛불시민혁명과 깨어있는 법관들 덕분에 찾아왔다. 때를 놓치지 말고 이번 촛불개헌 때 제왕적 대법원장 시대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끝장내고 사법부를 국민을 위한, 소신 법관에 의한, 법의 제국으로 개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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