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권력 지탱한 최루탄은 살인 무기였다
독재 권력 지탱한 최루탄은 살인 무기였다
[함께 사는 길] 영화 <1987>, 그리고 최루탄 권력
2018.04.14 11:16:43
독재 권력 지탱한 최루탄은 살인 무기였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오를 때까지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은 1987년 1월 물 고문을 받다 숨진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의 죽음부터 6월 9일 최루탄에 목숨을 뺏긴 이한열에 이르는 격동의 현대사를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영화는 조작과 은폐를 서슴지 않는 권력의 민낯을,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분노한 민초들의 함성이 거대한 물결이 된 상황을 그려냈다. "대학생이 죽었는데 보도지침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던 영화 속 대사는 시대 상황을 함축해 보여주면서도, 힘이 있다. 영화는 그런 진실의 역사를 보여준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헌법에 기록돼 있지만, 그 시절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예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뽑힌 권력은 부실한 정통성만큼이나 거센 국민 저항을 안기부, 경찰 등과 같은 국가기관을 동원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억압했다. 권력에 대항하는 행위에 최루탄을 쏟아부어 해산시켰다. 당시 최루탄은 권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이었다. 어쩌면 최루탄에서 권력이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 <1987>을 계기로 최루탄 잔혹사를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영화 <1987>(장준환 감독, 2017) 스틸컷.


군사용으로 사용된 최루탄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사용 중단을 선언하기 전까지 최루탄은 일상사였다. 최루탄은 흔히 '사과탄'으로 불리는 KM25, 총기에 끼워 발사하는 SY44탄, 차량에서 발사하는 다연발탄 등이 있다. 최악은 역시 '지랄탄'으로 불리는 다연발탄이다. 지랄탄을 과하게 흡입하고 나면 헛구역질은 눈앞이 노래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고, 개중에는 간질병 환자처럼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이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하얀 헬멧과 청색 재킷의 백골단(무술 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으로 구성된 경찰 사복 체포조)이 몰려와도 다리가 풀려 뛸 힘조차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최루탄이 처음 사용된 건 1930년대 일제 강점기였다. 역사학자 전우용에 따르면 '클로로벤질리딘 말로노니트릴(chlorobenzylidenemalononitrile)'이라는, 흔히 'CS 가스'로 불리며 호흡곤란과 눈물샘을 자극시키는 화학물질은 영국 과학자가 최초로 발견했다고 한다.(2017년 6월 14일 자 <한겨레>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중 '최루탄' 인용) 이 물질을 최루탄이라는 무기로 만든 것이 1930년대. 1934년 <동아일보>를 보면 미국 미네소타에서 파업 노동자들 상대로 최루탄을 사용했다는 보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5년 조선총독부가 경성을 공격하는 가상의 적을 상대로 최루탄 훈련한 것이 최초로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경비병이 최루탄 10여 개를 사용했고, 1955년 강릉, 군산, 부산 등에서 미군이 던진 최루탄에 주민 100여 명이 중경상을 입기도 했다.

이전까지 미군만 사용하던 최루탄을 1958년부터는 우리나라 경찰도 보유하게 됐다. 당시 경찰 치안국은 간첩 작전과 시위 해산 목적으로 최루탄을 전국 경찰에 보유토록 하면서 6월 6일 한강 백사장에서 최루탄 폭발실험을 가졌다. 1960년 자유당 정권은 3.15 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사용했고, 이때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이 실종됐다. 결국 실종 27일 만인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 재질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됐다. 앞서 1960년 2월 자유당 정권은 북한이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간첩을 남파할 것이라며 이를 대비한 최루탄 발사 훈련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간첩 잡겠다던 최루탄은 결국 17살 소년의 안면을 파고들어 죽음에 이르게 했고, 이 사건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총기에 끼워 발사하는 원통형 SY44 직격탄의 피해는 영화 <1987>에서 배우 강동원이 열연한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죽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찰에 따르면 SY44류는 직격 발사가 되지 않게 설계됐다고 한다. 그러나 1991년 8월 숭실대 총학생회가 실험을 통해 보여 준 것은 이와 달랐다. 발사기를 90도 각도로 옆으로 뉘어서 쏘거나 방아쇠를 빠르게 앞으로 밀면서 당길 경우 45도 미만의 직격탄 발사가 됐다.

▲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은 직후의 모습. 이한열기념사업회는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지난해 6월 네이선 벤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가 촬영한 당시 현장 사진을 공개했다. ⓒ이한열기념사업회


계속된 최루탄 사고

SY44 최루탄은 발사 후 2.5초 지난 터지도록 돼 있는데, 이한열의 경우 최루탄이 터지면서 뇌관에 있던 구리가 뇌를 관통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다. 당시 직격탄의 위력을 몸으로 경험한 이들이 많다. 1987년 새내기 대학생으로 시위 현장에 참여했던 환경연합 염형철 전 사무총장은 그중 한 명. 그는 "당시 전경이랑 10미터 되는 거리에서 직격탄을 맞았다. 최루탄이 터지진 않았지만 물리적 충격으로 입술 주위에 구멍이 나 17 바늘 꿰맸다"고 말했다. 남한강 지킴이 이항진 여주시의원도 눈 부위에 직격탄을 맞은 일이 있다고 했다. 광대뼈와 코뼈를 같이 맞았기 망정이지 자칫 실명할 뻔했다. 이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다.

김주열과 이한열의 죽음과 수많은 최루탄 피해자들의 증언은 독재 권력을 지탱해 주는 최루탄이 살인 무기였음을 말해준다. 불행한 것은 1987년 6월 이후에도 최루탄에 의한 사고가 계속됐다는 점이다. 1990년 3월 경찰 치안본부는 안전도 높은 새 최루탄을 개발했다며 KP1, KP2, YS 등으로 명명했다. 이한열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구리 뇌관을 고무로 대체하고 몸체도 특수 플라스틱을 사용해 폭파 시 파편 효과를 줄이도록 제작했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 그러나 1990년 4월 직격탄에 한 대학생의 치아 10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5월에는 최루탄 파편에 실명하거나 이마뼈가 함몰하는 사고가 계속됐다. 불발탄을 경찰에 신고하려다 터져서 손가락 3개가 절단 되는 등 전국적으로 불발탄 사고도 벌어졌다. 1990년 9월에는 경찰이 쏜 최루탄이 수술실 주변에서 터져 급박한 상황에서 20여 분간 중단됐다가 의료진이 방독면을 쓰고 수술을 재개했던 일도 있었다.

1991년 5월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 과정에서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경찰은 서울 퇴계로 일대에 10분 동안 1000여 발의 지랄탄과 최루탄을 쏴 댔다고 한다. 그야말로 '최루탄 공화국'이다. 이 때문에 1991년 5월 영국 언론 <더 타임스>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최루탄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치약 사용이 늘었다며 한국에 최루탄 재벌과 함께 치약 재벌이 등장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치약 재벌은 알 수 없지만, 최루탄 재벌은 확실했다. 1980년대 최루탄을 독점 생산하는 삼영화학 한영자 사장은 1985년 고액납세자 순위 4위였다가 1988년에는 삼성, 현대 등 대기업 회장을 제치고 28억7000만 원으로 고액납세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삼양화학은 1989년 최루탄 제조면허를 반납했지만, 그 역사적 악명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최루탄의 성능을 높이기 위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최루탄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금지되었다"고 지적했다. 최루탄은 염소와 브롬(브로민) 화합물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는데, 인체 유해성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브롬은 생식독성, 즉 남성의 정자수를 감소시키며, 여성의 불임을 일으킬 수도 있는 물질로 알려져 있다.

화학물질로 구성된 최루탄

1964년 4월 22일 자 <경향신문>은 최루탄 가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기관지염과 눈병, 심할 경우 실명 위험도 있다는 전문의 의견을 보도했다. 실제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 중에서 최루탄 때문에 물집과 진물이 생긴 사례가 보도됐다. 1990년에는 1987년 6월 시위 현장을 지나가다 최루탄이 터지면서 호흡곤란을 겪던 시민이 사망해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은 일도 있었다.

최루탄의 인체 위해성을 본격적으로 알린 건 1980년대 공해문제연구소와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에 의해서다. 당시 환경운동은 민주화운동과 궤를 같이한 반공해운동이었다. 이들은 1987년 당시 최루탄의 위해성 분석을 위해 미국에 있는 대학 연구소로 샘플을 보내기도 했다. 이어 최루탄의 부작용, 소비량과 민중 탄압의 함수관계, 최루탄 재벌 등에 관한 내용이 담긴 <피눈물 흘리는 민주주의!>, <최루탄! 그 죽음의 옷을 벗긴다>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만들어 시위 현장에서 배포했다. 이 책은 당시 대단히 인기 있는 책이었다고 한다(<자연의 친구들 2> 신동호 지음, 도요새 펴냄).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98년부터 CS 가스 최루탄은 사실상 사용되지 않았다. 1999년 12월 15일 이무영 경찰청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시위를 막자고 최루탄을 쏘면 화염병이 등장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며 무최루탄 원칙을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지난 2011년 말에는 CS 최루탄을 국내에 도입한 지 30년 만에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대신 CS 최루액이 등장했다. 물대포에 최루액을 섞으면 최루탄과 똑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CS 최루액에 발암물질인 디클로메탄이 들어 있다고 분석했다.

2011년 11월 21일 자 SBS <8뉴스>에 따르면, 경찰이 CS 최루액의 안전성을 증명한다고 실시한 공개실험에서 CS 최루액에 의해 스티로폼이 녹아 버리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이 때문에 경찰은 CS 최루액을 전량 폐기하고 '파바 최루액'을 도입했다. 인체에 무해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마저도 여전히 유해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최루탄의 종류도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건 최루탄이 결국 억압의 상징이고, 그 사용량이 많을수록 권력의 불통을 증명한다는 거다. 권력은 언제나 통제를 원한다. 오늘이 어제 살던 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었다는 점에서 그런 권력을 바르게 이끌 수 있는 건 결국 '국민의 힘'이 아닐까 싶다.

▲ '최루탄이 없는 순결한 조국강토를 만들자'는 현수막을 들고 6월 민주항쟁에 참가한 시위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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