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서평] 레이코프가 다시 들려주는 은유와 프레임의 개념 전쟁
2014년 4월 25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함께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있을 때였다. 한 외신 기자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질문하던 중 이렇게 덧붙였다. "잘 아시겠지만 푸틴 대통령은 만일 자신이 물에 빠진다면 대통령께서 자신을 구해줄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서, 대통령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대답이 옳았나요? 또한 (대통령께서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푸틴 대통령이 당신을 구할 것이라 생각하시는지요?" 당시 미국과 러시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급습과 미국 국가안보기관의 기밀 유출자인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J. Snowden)의 러시아 망명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 질문에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당연히 그를 구하겠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저 밖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왕년에 수영 좀 했거든요. 하와이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때 텔레비전에서 들렸던 소리로 미루어보아 사람들은 이 외신 기자의 질문과 오바마 대통령의 대답을 농담으로 여기고 웃음으로 대해주기 바빴던 듯하다. 안타까웠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외신 기자는 그 시점에서 물에 빠진 누군가를 구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정말 단순한 대인 관계 호기심에서 제기했을까? 

2015년 1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이슬람 급진 무장 세력이 잡지사인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의 사무실에 침입해 총기를 난사하여 열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가해자들은 도주하여 파리 근교에서 인질극을 벌이다가 프랑스 당국의 공권력에 의해 사살되어 사건 자체는 일단락되었다. <샤를리 에브도>는 신랄한 사회풍자 만평을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날 희생된 스테판 샤르보니에(Stéphane Charbonnier)가 2009년부터 편집장을 맡은 이후 이 잡지는 주로 이슬람교 풍자와 비판을 해왔으며, 이로 인해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인 알카에다는 그를 처형 대상으로 수배했다. 충격적이었다. 사건 자체도 비극적이었지만, 특정 집단이 언론 매체를 통해 비(非)물리적인 방식으로 만들어낸 작용이 얼마나 엄청난 물리적인 반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언어적 풍자가 물리적 타격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논리적이거나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은 아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두 달여가 지난 2013년 5월 7일, 청와대 대변인이 방미 중인 대통령을 수행하던 중 인턴 성추행 물의를 일으켜 이틀 뒤 전격 경질되었다. 그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 대변인은 '인턴'이라는 말 대신에 '가이드'라는 말을 사용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말을 들은 대중은 분개했다. 성추행이라는 부도덕한 범죄 사건의 용의자임을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가이드'라는 말을 사용한 그의 언행이 적절하지 않음은 물론,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여론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리라. 

이 국제적 추문은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린 씁쓸한 사건이었지만, 인지언어학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나로서는 물의를 야기한 그 사람의 낱말 선택이 정말 흥미로웠다. 일반 대중이 언어학의 맥락에서 의미 틀이라는 인지 기제를 배우거나, 이 틀을 찾아내는 훈련을 받지는 않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환기하는 의미 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렇게도 커다란 울림을 주고, 그들의 가치판단 과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체감할 수 있었다. 어떠한 맥락에서는 ‘인턴’과 비슷하게만 보이던 '가이드'라는 낱말을 사용한 것이 어째서 그 언어 사용자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을까? 말 한마디가 지니는 영향력을 잘 알고 있어야 할 국가기관의 대변인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과 그 본질을 모두 이해했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사실은 그들에게서 수많은 논리적 오류와 비약이 드러난다. 왜 그 외신기자는 세월호 참사 후 열흘이 지나가기도 전인 그 시점에 공식 질문의 주제로는 사족에 가까운 상황―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황―을 질문했을까?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가들은 그림과 글로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했을 뿐 어떠한 물리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왜 물리적으로 극단적인 피격을 당해야 했을까? 또한 그 테러리스트들은 어떤 연유로 자신들이 가한 테러 공격을 '되갚음'이라고 굳게 믿었을까? 왜 청와대의 전 대변인은 '인턴' 대신 '가이드'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 또 이 대변인의 용어 선택은 왜 사람들을 분노케 했을까? 

이들 사례뿐일까. 2016년 겨울, 특정 지역에 전략적으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드)를 배치하는 것에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표명했던 그 지역의 주민들은 2017년 5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미사일 배치에 적극적으로 찬성 의견을 내놓았던 보수 진영의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새 정치'를 기치로 내세웠던 한 정당 대표는 2017년 프랑스의 새로운 대통령을 평가할 때 언론에서 썼던 '극단적 중도주의'라는 모순어법의 어휘를 미래에 추구해야 할 대안으로 들고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씁쓸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작금의 한국 정치에 정말 일관성 있게 가치를 믿고, 가치를 수호하며, 가치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있기는 할까?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이러한 현실 인식에 마치 준비된 답이 있다고 이야기나 하듯,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와 엘리자베스 웨흘링(Elisabeth Wehling)의 책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인지과학이 밝힌 진보–보수 프레임의 실체>(Your Brain’s Politics, 조지 레이코프·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생각정원 펴냄)는 이러한 비약을 메우고 우리에게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게 해준다. <삶으로서의 은유>(1980/2002), <몸의 철학>(1999), <프레임 전쟁>(2006),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2007), <폴리티컬 마인드>(2008),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전면 개정판)>(2014)를 비롯한 레이코프의 저술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웨흘링과 레이코프가 나누는 대담을 전사한 형식으로 이뤄진 이 책은 원래 두 분의 다른 저술인 <이기는 프레임>(2012)보다 먼저 독일에서 출판되었는데, 저자들이 새롭게 다듬어 2017년 영어로 펴냈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는 이 영어판을 한국어로 옮긴 책이다. 

이 책은 저자들이 정치적 삶을 개념화하는 은유와 의미 틀, 프레임 구성에 대한 심리적 실재를 일관성 있게 증명하고 주장해, 변화무쌍한 정치 현실에 내재하는 본질은 변함없이 그러한 인지 기제에 근거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여정의 초입이다. 생각해보라. 여정을 시작한다는 처음의 마음가짐과 설렘을, 또한 점점 다가올 목적지에 대한 기대감과 강한 믿음을! 초심과 설렘이 곳곳에 숨어 있는 만큼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를 읽으면, 한편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선한 인물과의 평범한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듣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는 인지의미론의 주요 논제인 개념적 은유와 의미 틀에 대한 개론부터 시작하여, 이러한 인지 기제를 바탕으로 하는 개념화 과정이 경제와 철학, 신학, 정치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력을 끼치는지, 또 끼쳐왔는지를 부담 없이 이야기한다. 은유적 사고가 문학 비평에서 말하는 은유와 어떻게 다른지의 논제에서 시작하여 정치와 국가에 대한 다른 견해, 진보와 보수를 개념화하는 데 필수적인 우리의 경험은 무엇인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용어 기저에 어떠한 개념화 과정이 숨어 있는지, 이러한 개념화 과정이 우리의 뇌 구조와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 중도파라고 불리는 정치적 중도 세력을 어떻게 범주화할지, 사실은 프레임 구성과 별개로 진술할 수 있는지, 신은 존재하는지, 동일한 현상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논쟁적 개념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깨어 있는 저널리즘이란 무엇인지의 논제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후에 나온 책들보다 훨씬 편하게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마음의 울림을 준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한국에서 태어나 생활해온 독자라면 누구나 들어본 질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아이에게 부담스러운 질문이 없다. 가볍게 골려주려고 내뱉은 문장 하나가 아이에게 거대한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셈이다. 나는 이 질문을 쉽사리 묻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질문만큼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개념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예시도 없기 때문이다. 

▲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조지 레이코프·엘리자베스 웨흘링 지음, 나익주 옮김, 생각정원 펴냄)ⓒ생각정원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해도 쉽지 않은 가치판단의 문제를 아이에게 떠넘기는 것은, 어찌 보면 세상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음이 당연한데도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도록 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일은 아닐까. 이는 마치 레이코프가 인용한 질문, "아이가 한밤중에 울 때, 당신은 아이를 안아줄래요?(If your baby cries at night, do you pick him up?)"에 대한 대답이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나누는 기준을 내포한다는 설명과 그 맥을 같이한다. 

한국 정치는 어떠한가? 저자인 레이코프가 이야기하듯 '엄격한 아버지 가정 모형'의 보수와 '자애로운 부모 가정 모형'의 진보가 각각 자신들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신 고유의 용어로 해당 가치를 프레임에 넣고 일관성 있게 이를 실현하려 애쓰는가? 아니면 가치나 철학과는 별개로 정치 세력 불리기라는 단기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정책을 고민하는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들여온 것이 아닌, 스스로 일궈낸 것임이 자랑스럽고, 또 그 저력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작금의 정치 상황을 보면 나는 아직 후자라고 본다. 이제 한국의 정치도 가치에 대한 철저한 총화와 고민을 바탕으로 사회 현안에 일관성 있게 생각을 정리하여 건강한 보수–진보 역학 관계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 절실하다. 

한국의 정치도 때로는 책임과 공감의 가치를 중심으로, 때로는 올바른 동기부여와 안보의 가치를 중심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진보와 보수의 탄탄한 가치를 바탕으로 건강한 경쟁과 토론을 통해 일관적이면서도 조화로운 정반합을 정직하고 당당하게 이뤄내야 한다. 독자들에게 감히 권하건대, 웨흘링과 레이코프가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에서 친근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바람직한 민주주의 정치의 바탕이 되는 개념화 방식과 진보/보수의 가치에 대한 생각과 판단을, 여정을 막 시작했을 때의 설렘과 벅차오름으로, 치열하게 공감하고 또 고민해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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