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선의
나를 위한, 우리를 위한 선의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것 ③·끝] 선의의 공동체를 꿈꾸며
2018.01.09 08:21:52
장마가 이어지던 어느 여름, 나는 눈앞에서 죽은 사람을 보았다. 몇 주째 맑은 하늘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줄곧 집안에서 글을 쓰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집안이라지만, 바깥의 날씨를 간과할 수는 없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집안에도 파고들어, 머리 위에 뜨거운 물수건을 얹어 놓은 듯했다. 나는 갑갑한 기분을 달래려 자주 산책삼아 집 앞으로 나서곤 했다. 그날도 큰 이유 없이 편의점에 가던 길이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길에 나와서 "어떡하지"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 몇이 "119에 신고해요"하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태도가 제법 침착해서, 나는 별일 있겠는가 싶었다. 편의점에서 나오는데, 구조대의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했다. 곧이어 구급차가 왔다. 언제 소문이 퍼졌는지, 동네 사람들이 제법 나와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외부의 노천 창고 같은 곳을 향해 있었다. 평소에는 늘 철문이 내려져 있는 곳이었다. 먼저 보인 건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액체였다. 그 다음, 사람이 허공에 목을 매달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옆에서 한 할머니가 "우리 아들 어떡해"하며 조용히 통곡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난겨울 근처에서 풀빵 장사를 하던 남자라 했다. 몇 번 지나가며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의 겨울에만 봤으니, 그 이전에는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나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집에 들어와 버렸다. 이 땅의 무언가가 자꾸 허물어지고, 불타고, 죽어 나가고 있었다. 새로워지는 거리에서, 새롭게 올라 선 건물 앞에서, 거대하고 깨끗해지는 공간에서, 옛 흔적들은 작은 동물처럼 남아있었다. 때론 길에서 죽은 동물의 사체같이 되어 버렸다. 

장마는 가뭄으로 가득한 땅에 비를 내려 작물을 자라게 한다. 식물은 자기 안에서 빛과 물을 모아 자신의 존재를 이룬다. 나머지 동물은 빛과 물을 머금은 식물을 먹고 자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빛과 물이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다. 우리는 빛과 물의 자식들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그 남자도, 태양 없는 한 시기를 견디지 못했다. 그날 아침 일어나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누군가 그에게 "좋은 아침"이라고 한 마디 해줬다면, 그와 함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설 누군가가 그 곁에 있었다면, 한 줄기 선의를 건네받았다면 그는 태양이 뜰 때까지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옛 친구를 떠올렸다. 그가 이 세상에 있던 마지막 겨울에, 그는 나한테 소포 꾸러미를 하나 보냈다. 따뜻한 겨울을 나라는 의미의 발열내복과, 자신의 보물 1호라며 야구선수 강민호한테 받은 싸인볼과 함께 장문의 편지 네 통을 넣어서 보낸 것이었다. 그 전에 내가 쓴 책 몇 권을 보내준 것치고는 과분한 선물 꾸러미였다. 그 친구가 가장 좋아했던 내 책의 서문은 '청춘의 자살'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다. 청춘이 자살하는 사회를 더 두고 보아선 안 된다, 따위의 말들이었다. 그 친구가 써주었던 서평은 아직도 그의 블로그에 남아 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차일피일 미루며, 그의 편지에 답장도 하지 못했다. 

지방의 무슨 신발 공장에서 일했다던 그는, 어느 날,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마도 그 이후,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들.을 보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한테는 총 세 개의 싸인볼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내게 전달되었다. 어쩌면 그는 선의를 찾을 수 없는 세계에서, 하찮은 선의의 조각이나마 건네주었던 이들에게, 어떻게든 보답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를 찾는 이라곤 거의 없던 시절에, 그나마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보내주었던 한 권 한 권이 그에게는 큰 선의로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장을 찾은 고등학교 시절 친구는 나를 포함해 둘 뿐이었다. 

세상에 사람은 넘쳐나고 있다. 그 모든 이들이 관심과 사랑, 선의를 갈구한다. 그들은 일말의 인정과 사랑을 얻고자, 삶을 지탱하게 해 줄 선의를 붙잡고자 분투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자 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고자 한다. 삶이란 때론 한없이 복잡한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한없이 단순하다. 사람들은 그저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그로부터 한 줌의 행복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삶이 복잡해지는 건 단지 지금 내 곁에 그 한 줌의 선의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랑조차 손해와 이익의 계산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계산’이란 당최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선의 대신 계산이 자리 잡은 삶은, 그러한 사회는 정말로 더 행복한 삶이고 더 발전된 사회일까?

어쩌면 진실이란 단순하다. 삶의 정답이라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게 아닐 수 있다. 우리는 그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강물 같은 선의를 서로에게 보낼 수 없어서, 그토록 단순한 삶을 살 수 없어서, 인생에 복잡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의 조건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아진다. 땅바닥을 지나가는 개미 행렬이나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 한 장, 슈퍼마켓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하나면 행복할 수 있던 하루 위에 온갖 부가적인 결핍들이 더해진다. 내가 속한 공간이 불만스럽고, 소비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디어에서 비추는 각종 화려한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힌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쌓아가는 과정 같지만, 실은 더 많은 결핍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 결핍의 홍수 속에서, 누가 더 자신을 가까스로 유지하는가 하는 경쟁이다. 

정신없이 삶을 살아나가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얻으려 그리도 발버둥치는 것인지 의아할 때가 있다. 다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인생을 고민한다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그저 지금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선의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극복해야 할 것은 선의를 미루고 있는 현재일 뿐이다. 나를 채우고 있는 온갖 변명거리를, 악마의 속삭임 같은 언어의 함정을, 복잡한 논리를 만드는 데 열중하는 관념을 극복하고, 마음을 앞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거리도, 삶의 터전도, 도시도 그런 것이어야 할는지 모른다. 이 도시에는 그저 돈 쓸 곳만 갈수록 넘쳐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지런히 이런저런 거리를 오갔다지만, 한 해쯤 지나고 나면 그 거리들을 돌아다녔던 일들이야 그저 별반 의미도 없이 허물어지고, 남는 것은 사랑하는 이와 산책을 나섰다 돌아와 수박을 잘라먹던 저녁 정도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거리도, 동네도, 도시도 그런 저녁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서로에게 보내는 선의로 뒤엉켜, 그 속에서 기억들을 쌓아나가는, 그리하여 삶의 기억이 되고 거리의 역사가 되는 동네가 이 땅에 자리 잡길 바란다. 우리가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원한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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