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난 것도 아닌데, 광주에 관(棺)이 바닥 났다"
"전쟁 난 것도 아닌데, 광주에 관(棺)이 바닥 났다"
[작은책] 내가 겪은 5.18 ②
2018.01.07 10:29:55
"전쟁 난 것도 아닌데, 광주에 관(棺)이 바닥 났다"
전두환이 "광주 놈들은 싹 다 죽여 버려!"라고 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수천 명의 시민이 금남로에 모였다. 나도 시위대에 섞여서 구호를 외치면서 앞으로 나갔다. 시위대 맨 앞에 학생과 청년들이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 우리도 따라 부르면서 행진했다.

공수부대원들은 돌멩이가 날아가도 안 피하고 그대로 맞으면서 돌진했다. 지휘관이 "앞으로 돌격!" 하고 외치면, 공수대원들은 "으악!"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시위대를 곤봉으로 때렸다. 마치 살인 면허라도 받은 듯 그들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도로는 삽시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했고, 다들 살려고 이리저리 골목길로 도망 다녔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덜덜 떨며 집에 들어왔다. 엄마가 "어제 그 일을 겪고도 오늘 또 나갔냐. 제발 앞으로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라고 하셨다. 당시 대학생이던 동생이 5월 3일 군에 입대하면서 엄마가 큰 걱정을 덜었는데, 막내딸인 내가 그러고 다니니 심정이 어땠을까.

하지만 다음 날, 걸어서 또 금남로에 나갔다. 텔레비전 <9시 뉴스>에 광주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코미디와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깔깔거리는 모습에 분노가 치밀었다.

▲ 1980년 5월 비닐하우스 전용 투명비닐로 희생자 시신을 처리했다. ⓒ광주적십자병원=연합뉴스


석가탄신일인 5월 21일,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그날 공수부대원들은 수만 명의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아 댔고 심지어 헬기로 기총사격을 했다. 나도 수만 명 틈에 끼어 있다가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도청 뒷골목에 있던 반이비인후과 병원 앞까지 도망쳐 한쪽에 서 있는데, 갑자기 옆에 있던 남학생이 픽 쓰러졌다.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허벅지를 맞은 것이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해 '방금 내가 죽을 수도 있었어. 내가 살아야 민주주의도 있지' 하면서 걸음아 나 살려라 골목으로 도망쳐 집에 갔다.

지금도 당시 상황이 눈앞에 아른거릴 때마다 너무 고통스럽다. 나중에 들으니까 친구 아버지도 그날 가톨릭센터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다가 헬기에서 쏜 총알을 맞고 그대로 사망했다. 결국 시민군들이 무기를 탈취해 '광주는 우리가 지킨다'며 똘똘 뭉쳐 맞서자, 겁을 먹은 공수부대가 일단 물러갔다.

다음 날 아침, 시민들은 밤사이 피로 물든 거리를 청소했다. 나도 청소를 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왜 지금 내가,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 이러고 있는 거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일터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각자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금남로를 청소하고 있다니 기가 막혔다. 도대체 전두환은 어떤 사람이기에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광주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지…. 속에서 분노가 끓었다. 시민군이 바리케이드로 사용한 대형 화분, 공중전화 부스, 시내버스 표지판 등도 여기저기 쓰러지고 깨지고,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양동시장에서 시민군에게 밥을 해서 준다는 소문을 듣고 나도 그곳에 가 보았다. 상인들은 아침부터 솥을 걸고 밥을 해서 밤새 경계근무를 선 시민군에게 먹였고, 지난밤 있었던 야간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생매장당했는지, 또 다친 채 어디로 끌려갔는지에 대한 소식을 주고받았다. 상인들에게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지갑에 있던 돈 2만 원을 드리면서 쌀값에 보태라고 했다. 엊그제까지 주먹밥 해서 날랐던 우리 언니 생각이 났다. 순간 '언니네도 쌀값 참 많이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새삼 언니가 자랑스러웠다.

도청 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에도 가 봤다. 강당과 그 앞에는 시체들이 즐비했다. 내가 태어나서 시신을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꺼 번에 그 많은 시신을 보고는, 토하고 울고 난리가 났다. 처음엔 시민들이 즉석에서 모금해 나무 관(棺)을 사 거적에 싸인 시신을 입관하고 태극기를 덮어 놓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광주 시내 장의사에 있는 관이 바닥이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관도 없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 생각이 가끔 떠오를 때면 너무 괴롭다.

5월 25일 자정이 넘어 장갑차와 탱크가 '따다다다' 콩 볶듯이 상무대에서 시내로 진격했다. 우리 집이 그때 광주 외곽에 있어서 상무대와 가까웠다. 초여름 밤인데 창문도 못 열고 창마다 두꺼운 이불로 가렸다. 엄마, 아빠가 총소리를 들으면서 "6·25전쟁 때 인민군도 이러지 않았어야. 인민재판을 해서 처단을 했구만, 세상에나 국민을 지키라는 군대가 이렇게 무고한 시민들을 많이 죽인다냐" 하셨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총소리가 너무 커서 놀랍고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아서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새벽에 진압군이 광주공원에 집결했고 26일 자정 넘어서 광주 도청은 완전히 진압됐다. 도청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시민군들은 끌려가거나 죽었다. 당시 광주 시민이 80만 명 정도였는데, 투입된 군인이 2만 명이었다니…. 우리 광주 사람을 국민이 아닌, 죽여 없애야 하는 존재로 알았던 것이다.

<택시운전사>(장훈 감독, 2017) 영화에서와 달리 당시 금남로 현장에는 외신기자도 드문드문 보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고 고맙다고 했다. 그들이 광주 소식을 전 세계에 알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미군이 전두환 편을 들며 군의 광주 투입을 승인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반미(反美)' 감정은 아마도 그때 싹튼 것 같다.

한때 우리끼리도 광주 이야기는 금기였다. 1990년대에 와서야 서울에 사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트라우마였다. 다시 '5·18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사단'을 구성한다고 하니, 그동안 밝히지 못한 진상을 다 파헤쳐서 수없이 죽어 간 광주 사람들의 한을 풀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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