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이 만든 민주주의, 석유가 만든 민주주의
석탄이 만든 민주주의, 석유가 만든 민주주의
[프레시안 books] <탄소 민주주의: 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
석탄이 만든 민주주의, 석유가 만든 민주주의

에너지 민주주의가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원자력계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의견에 기초해 공사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는 원칙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공론화위원회에서 에너지 전문가가 배제되었다는 볼멘소리도 있지만 시민 참여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 하다. 에너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논쟁적인 사안을 시민 참여없이 결정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할까? 시민들의 정책 결정 과정 참여가 늘면 에너지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을까? <탄소 민주주의: 화석연료 시대의 정치권력>(티머시 미첼 지음,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옮김, 생각비행)는 에너지 민주주의를 더 넓고 더 깊게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석탄과 석유의 시선으로 근대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파헤친다. 에너지 민주주의가 논쟁 사안에 대한 시민 참여로 국한되지 않기 위해, 에너지 민주주의에 잠재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펼쳐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을 덮을 즈음이면 에너지 전환이 시작되는 곳, 다시 말해 석유가 무너트리고 새롭게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석유가 무너트린 민주주의


석유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석유 수출로 얻은 오일머니가 독재 정권을 지탱하는 자금으로 쓰여온 것을 생각하면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석유는 강대국의 먹잇감이 되어 시시때때로 외세의 개입을 초래한다. 중동 지역의 석유 통제권을 놓고 서구 열강이 다투는 내내 중동 지역의 민중들은 전쟁과 내전, 테러의 위협에 시달려야했다. 오랜 기간 중동 지역을 연구해온 만큼 저자는 '석유의 정치'를 세밀하게 파고든다. '석유의 저주'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이 알려진 만큼 익숙한 이야기의 반복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중반 중동 지역에서 펼쳐진 영국과 미국의 석유 패권 경쟁을 국제금융시장의 주도권 다툼 속에서 파악하고 이것을 다시 송유관의 경로·직경을 둘러싼 갈등과 연결시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흥미로운 분석이다. <탄소 민주주의>는 다소 익숙한 석유의 정치를 다각도로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봄직하다.


하지만 이 책의 초점은 석유 통제권이나 석유 이익의 배분에 맞춰져있지 않다. <탄소 민주주의>는 에너지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이 책의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 중 하나는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을 민주주의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지점이다. 잠시 머릿속으로 석탄으로의 전환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지 상상해보자. 아마도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자연의 재생 속도에 구애받지 않는 사회가 된 것일 게다. 석탄은 증기기관, 철과 결합하여 삼림과 축력의 재생 속도로부터 해방된 산업사회의 기틀을 닦았다. 탄광에서 캐낸 석탄이 철도와 운하를 따라 도시와 공장으로 대량 운송되지 않았다면 도시화와 산업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탄소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석탄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확보한 것에 주목한다. 자본가의 감시는 땅 속 깊은 곳까지 미치지 못했고, 땅 위로 올라온 석탄은 철도 및 운송 노동자들의 파업에 취약했다. 덕분에 에너지 부문의 노동자들은 강력한 교섭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들의 전략적 행위는 투표권 쟁취와 복지제도 도입 등 20세기 초반 서구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석탄 네트워크에서 노동계급이 차지한 전략적 위치를 이해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샬플랜이 유럽의 전후 복구를 외치며 석유로의 전환을 강조한 이유도 새롭게 보인다. 석유는 석탄과 달리 감독자가 통제할 수 없는 탄광과 같은 대규모 작업장이 없었다. 또한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도는 '저항 없는' 송유관으로 대체되었다. 나아가 석유는 유전 탐사에서 채굴에 이르기까지 석탄에 비해 전문지식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노동과정에서 기술자와 관리자의 역할이 더 컸다. 이로 인해 석유로의 전환과 함께 에너지 네트워크에서 조직화된 노동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고, 그만큼 노동계급의 정치적 요구에 덜 취약해졌다. 즉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은 단순히 에너지원이 바뀐 게 아니라 사회적 세력관계의 재편을 동반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혹여 오해는 없어야한다. 이 책이 석탄 또는 석유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형태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탄소 민주주의>는 에너지 결정론이나 기술 결정론을 배격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를 사상이나 사회운동의 역사로 국한시키는 것도 비판한다. 민주주의는 물질과 관념, 경제와 정치, 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망 구성을 둘러싼 갈등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탄소 민주주의>의 기본 시각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석탄의 역사, 석유의 역사와 겹쳐져있다.

석유로 쌓아올린 민주주의


그렇다면 20세기 인류는 석유를 통해 어떤 민주주의를 쌓여 올렸을까? <탄소 민주주의>는 여러 갈래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간 곳은 '경제'의 형성이다. 이 책은 다소 도발적으로 석유의 부상과 함께 비로소 현대적인 '경제' 개념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초중반 유가는 계속 하락했다. 더구나 석유는 비교적 풍부했고 운송이 용이했기 때문에 고갈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석탄보다 훨씬 편리하게 원하는 곳 어디서는 석유를 이용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한 것 같았다. 나아가 석유에 기반을 둔 농업의 산업화, 석유를 활용한 합성화학물질의 개발은 식량과 천연자원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었다. 에너지 사용량과 식량 소비량, 자원 사용량이 계속 늘었지만 '한계'를 고민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불과 한세대만에 석탄 고갈을 우려하던 제본스같은 경제학자들은 자취를 감췄다. 다시 말해 값싸고 풍부한 석유는 경제학에서 자원고갈의 문제를 제거했고, ‘경제’는 물리적 한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화폐의 순환시스템으로 사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한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에 기초한 정치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저자의 말처럼, "석유를 기반으로 한 경제의 탄생은 탈물질화되고 탈자연화된 정치 형태를 가능케했다."


경제와 정치의 탈물질화를 고려할 때, 1970년대 석유위기와 함께 환경정치가 부상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계적 사고'의 부활은 시장의 부상과 함께 찾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탄소 민주주의>는 생태적 사고와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동시 부상을 '석유 정치'의 시각에서 추적한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의 석유기업들은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돌연 석유를 무한한 자원으로 간주해오던 계산 방식을 폐기하고 석유의 고갈, 석유 시대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었는데, 석유의 고갈이 가시화될수록 유가 상승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석유기업들은 석유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환경운동의 시선을 핵발전으로 돌리고자 했다. 동시에 석유기업들은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싱크탱크를 대대적으로 지원하여 국가의 개입을 공격하는 데 나섰다.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일달러의 순환이 증가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의 통제가 한층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석유위기로 시작된 1970년대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끝났다.

석유 이후, 에너지 민주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풍요로운 석유'의 시대는 끝났고, 기후변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기세를 떨치던 신자유주의 역시 임계점에 도달한 듯하다. <탄소 민주주의>는 석유위기와 환경위기, 금융위기가 마주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고탄소 생활양식은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소비자 부채 증가를 야기했고 주택담보대출로 수명을 연장해왔다. 금융화는 파생상품 거래를 활성화시켰고, 투기적 금융자본의 손길은 석유를 피해가지 않았다. 주택담보대출 시장의 붕괴가 금융위기를 촉발하고 유가 및 곡물가 급등과 연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월스트리트는 셰일가스 붐을 조성하여 다시금 값싼 화석연료의 시대를 꿈꾸고 있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전망이 불투명한 것은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있다.


석유 이후, 에너지 민주주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에너지 전환을 꿈꾸고 있지만 에너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탄소 민주주의>가 재차 강조하는 바,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 민주주의와 분리되지 않는다. 다만 인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따라서 사회-기술체계로서 새로운 에너지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각축은 민주주의를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에너지 민주주의의 미래 역시 에너지 전환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인식 수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탄소 민주주의>는 에너지 전환과 에너지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이다. 덤으로 화석연료의 눈으로 20세기 정치경제사를 꿰뚫는 즐거움을 준다. 책장을 넘길수록 에너지와 민주주의, 기술과 정치, 경제의 연결고리에 대한 고민거리도 늘게 될 것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연결지점이 많지만 엄밀하고 정교한 설명을 기대한다면 눈에 밟히는 곳이 군데군데 존재한다. 또한 미국, 유럽, 혹은 산유국과 다른 한국사회의 맥락 속에 대입하려면 추가적인 '번역'과 '연결망'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보편적 공급, 사회적 소유, 지역에너지, 시민참여 등 에너지 민주주의와 관련된 최근 쟁점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에너지 전환이 단순한 에너지원의 변화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문화의 포괄적 변화라는 점을 <탄소 민주주의>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드물다. 재생에너지3020 계획, 탈핵 로드맵 등 에너지 전환이 피해갈 수 없는 현실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민주적 에너지 전환'을 모색한다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지 않을 수 없다. 에너지 전환 없는 민주주의는 위험하고 민주주의 없는 에너지 전환은 공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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