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감염된 커밍아웃 게이 헌법재판관이 들려주는 이야기
HIV 감염된 커밍아웃 게이 헌법재판관이 들려주는 이야기
[프레시안 books] <헌법의 약속>
2017.05.24 08:37:07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을 전후해 많은 이가 헌법 정신을 되새겼다. 우리 헌법의 아름다움을 상찬하는 말과 글이 미디어를 타고 돌았다. 헌법이 약속했듯, 한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이를 어긴 이들의 만행으로부터 발발했다. 

우리는 괜찮을까. 혹여 우리는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하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정신을 무시하고 사는 건 아닐까. 이 헌법 조문 앞에 한 점 부끄러운 점 없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TV만 틀면, 소셜미디어만 켜면 헌법 정신을 무참히 짓밟는 이들이 한가득이다. 

타인의 종교에 관용을 보이지 않는 이, 성소수자의 인권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혐오발언자는 우리 주위에 넘쳐난다. 학력이 낮은 이, 장애인, 여성 상당수는 기회의 평등을 제대로 담보 받지 못한다. 동성 간 성애를 나눴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는 군인이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버젓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새 시대를 맞은 한국에는 실질적 민주화, 곧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중요한 과제가 떨어졌다. 지난 겨울 광장을 뜨겁게 달군 촛불 민심 앞에 많은 이가 일상의 민주주의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구체제 옹호자와의 타협으로 이뤄진, 완전하지 않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인종차별이 법으로 보장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도 한국과 비슷한 현대사를 거쳤다. 유색인종의 참정권을 부정하고 타인종 간 혼인을 금지하는 반인륜적 행위가 법의 미명 아래에 모두 보장됐다. 완전한 정당 활동, 완전한 집회의 자유를 여전히 누리기 힘든 한국 현실과 감히 빗댈 수 있는 상황이다. 

<헌법의 약속: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에드윈 캐머런 지음, 김지혜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커밍아웃한 게이이며, HIV 감염인인 백인 남성 저자가 차별이 만연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나 인권 운동을 거쳐 고등법원 판사, 대법원 판사, 헌법재판관으로 재직하며 겪은 일을 풀어낸 책이다. 저자의 경력 자체가 한국 사회에선 그저 놀라운 일일 뿐이다. 

남아공에는 상당 기간 헌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파르트헤이트가 법으로 보장될 수 있었다. 준법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고 넬슨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탄생케 한 남아공 사회는 곧바로 1994년, 헌법을 발효했다. 이어 헌법 수호 기관인 헌법재판소를 설립하며 민주주의로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남아공은 한국보다 민주화로의 이행이 더뎠다. 그럼에도 남아공은 곧바로 전진을 시작했다. 만델라는 당시 이미 HIV 보균자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게이임을 커밍아웃했던 저자를 고등법원 판사에 앉혔다. 

▲ <헌법의 약속: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에드윈 캐머런 지음, 김지혜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프레시안

저자는 책에서 고등법원 판사로 지명된 후, 이를 수락할 것이냐를 두고 고민한 과정을 밝힌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 너머의 보편적 권리를 알린다. '누구도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내각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공직에 서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보편의 인권을 존중한 끝에, 남아공 법조계는 아프리카 최초로 HIV 보균자인 게이 판사를 얻었다. 그만큼 진보의 폭을 넓힐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책은 가난했던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아파르트헤이트와 싸운 용감한 이들의 이야기, HIV 보균자에 관한 사회적 차별과 직접 법조인으로서 싸운 저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헌법은 사회의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며, 그로써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수호하는 존재임을 강변한다. 

수많은 헌법 관련 책 중에서도 이 책은 단연 돋보인다.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이긴 하지만, 저자의 이력 자체가 우리에게 헌법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강렬한 답을 선사한다. 우리 사회에서 저자와 같은 이력의 공직자를 언제쯤 볼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새로운 정부와 함께 지난 9년간 뒷걸음질한 우리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할 기회를 얻었다. 이제 필요한 건 더 실질적 진보다. 다행히도 우리 헌법은 이미 진보를 위한 중요한 정신을 성문화해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헌법 정신을 제대로 지키는 것뿐이다. 
이대희 기자 eday@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기자가 되면 거지부터 왕까지 누구나 만난다고 들었다. 거지한테 혼나고 왕은 안 만나준다.